푸틴과 통하던 ‘최고급 러시아 스파이’ 잃어버린 CIA

입력
2019.09.10 18:15
수정
2019.09.10 20:16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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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정부 고위층으로 성장, 푸틴과 통하고 크렘린 의사 결정에도 관여

“푸틴이 2016년 미 대선 개입 지시” 정보 제공도… 신변 노출 위험에 철수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017년 7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017년 7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수십 년간 러시아 크렘린궁 내부의 최고급 기밀 정보를 제공해 왔던 러시아인 스파이를 2년 전 미국 본토로 빼내 온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미국의 해외 정보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으나, 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 개입과 관련해 너무 민감한 정보가 공개되면서 그의 정체가 발각될 위험이 커진 탓이다. CIA로선 울며 겨자 먹기로 ‘공든 탑’을 무너뜨린 셈이다.

9일(현지시간) CNN과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CIA는 수십 년 전 러시아 정부의 중간 관리를 포섭한 뒤 미국의 스파이로 키워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그는 결국 러시아 정부의 최고위층 간부가 되는 데 성공했다. 미 정보기관의 한 전직 고위 관계자는 그의 위상에 대해 “크렘린궁 최고의 소식통이었다”라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 건 물론, 러시아 지도자의 책상 위에 놓인 문건 이미지도 제공해 줬다”고 말했다. NYT 역시 “푸틴의 이너 서클(중추 세력)은 아니었지만, 정기적으로 푸틴을 만났고 크렘린의 의사 결정에도 깊숙이 관여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한마디로 러시아 관련 정보의 노다지를 캔 것이다.

실제로 그가 미국에 건넨 정보는 거의 100% 사실이었던 데다, 매우 정교하기도 했다. 때문에 CIA는 그의 신원을 ‘극비 정보’로 다뤘다. 예컨대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 존 브레넌 당시 CIA 국장이 그와 관련된 정보를 대통령 일일 브리핑 자료에서 빼고, 별도 봉투에 봉인한 상태로 보고했을 정도다.

그러나 너무 내밀한 정보까지 전달한 게 화근이 됐다. 지난 2016년 말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 스캔들에 대해 미 정보당국은 “푸틴 대통령의 직접 지시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정부 내부에 침투한 스파이가 아니고선 획득이 불가능한 정보였다. 언론들의 집중 취재가 시작되면서 신변 노출 가능성이 커지자 CIA는 그에게 눈물을 머금고 ‘철수하라’고 권고했다. 당초 ‘(러시아에 남을) 가족이 염려된다’며 거부했지만, 이듬해 5월 이후 다시 건네진 미국의 2차 제안은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CIA 역대 최고의 정보 자산이 물거품으로 사라진 순간이다. 다만 현재 그의 소재지나 신원 등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일각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부주의한 기밀 정보 취급’이 그의 철수를 유발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수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이 사실을 최초 보도한 CNN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5월 백악관에서 러시아 외무장관과 만나 기밀 정보를 논의하고, 그 해 7월에는 통역사 메모를 압수하면서까지 푸틴 대통령과 ‘비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정보기관의 우려가 커졌다”고 전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전직 정보기관 관리들은 “러시아 정보원에 대한 언론의 취재와 보도만으로도 철수 작전 실행의 충분한 동기가 된다”고 NYT에 말했다. CIA와 백악관은 CNN 보도에 대해 “부정확하다”고 반박했으나, ‘귀환 작전’ 실행 자체를 부인하진 않았다.

어쨌든 CIA의 ‘러시아 정보’ 입수는 이제 큰 타격을 입게 됐다. NYT는 “내년 대선을 앞둔 가운데, CIA는 러시아의 개입 여부나 크렘린 동향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 CNN도 “해당 소식통은 러시아 내에서 푸틴을 꿰뚫어 보며 정보를 제공했던, 대체가 불가능한 인물” “하룻밤 만에 그런 인물을 다시 구할 순 없을 것” 등과 같은 소식통의 말을 전했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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