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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나달이 9일 미국 뉴욕의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열린 US오픈 남자 단식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트로피를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욕=로이터 연합뉴스

올해 US오픈 남자 단식 결승은 한마디로 ‘대반전’이었다. “노쇠화로 ‘빅3’ 중 가장 먼저 무너질 것“이라는 평가를 받던 라파엘 나달(스페인ㆍ2위)은 33세라기엔 믿기지 않는 체력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항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비매너 플레이로 ‘러시안 트롤’이란 별명이 붙었던 다닐 메드베데프(23ㆍ러시아ㆍ4위)는 환상적인 경기력으로 자신에게 쏟아졌던 야유를 환호로 뒤바꿨다. 승자도, 패자도 마지막엔 웃을 수밖에 없었던 한 편의 드라마였다.

나달은 9일(한국시간) 미국 뉴욕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의 아서 애시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 남자 단식 결승에서 메드베데프를 3-2(7-5 6-3 5-7 4-6 6-4)로 제압하고 2년 만에 US오픈 패권을 탈환했다. 경기 시간은 무려 4시간 49분. 자신의 19번째 메이저 우승컵을 품은 나달은 마지막까지 모든 힘을 쏟아낸 듯, 메드베데프의 마지막 리턴이 아웃되자 그대로 코트에 드러누웠다.

패자 메드베데프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위로를 전한 나달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오늘 승리는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다. 특히 이렇게 힘든 경기는 더 그렇다. 미친 결승전이었고, 메드베데프도 대단했다”며 눈물을 훔쳤다.

나달에게 이번 우승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나달은 파워를 앞세운 경기 스타일로 역대 최고의 테니스 선수 중 한 명으로 올라섰지만, 바로 그 스타일에 따른 반대 급부로 전성기에서 빠르게 내려올 것이라 평가를 받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신체 능력이 저하돼 특유의 장점이 퇴색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38ㆍ스위스ㆍ3위)의 코치 피에르 파가니니도 “각 선수마다 자신에게 맞는 적합한 경기 운영과 훈련 방식이 있지만, 나달의 것은 리스크가 크다”며 “푹신한 클레이코트와 달리 하드코트에선 나달의 무릎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 평가했다.

라파엘 나달이 9일 미국 뉴욕의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열린 US오픈 남자 단식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두 손을 올리며 기뻐하고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하지만 나달은 자신을 향한 비판을 뒤집기라도 하듯, 여전한 피지컬로 하드코트에서 메드베데프를 제압했다. 결승전에서 나달이 뛴 거리는 6.2km로, 4강과 8강에서 뛴 거리를 합한 것보다 많았다. 결승전 평균 랠리는 5.5회로, 나달이 이번 US오픈에서 치른 경기 중 가장 길었다. 평소 베이스라인에서 주로 플레이를 펼치는 나달은 이날 무려 51포인트를 네트 플레이로 따내며 코트 구석구석을 누비기도 했다.

1, 2세트를 선취하고도 메드베데프의 추격을 허용하며 2-2까지 몰렸지만 특유의 끈기와 정신력으로 버텼다. 메드베데프는 “내가 70살이 된 후에도 기억날 정도의 경기였다”고 혀를 내둘렀다. 나달에게 준결승에서 패했던 마테오 베레티니(23ㆍ이탈리아ㆍ13위)는 “나는 3, 4시간의 경기를 준비했왔는데, 나달은 6시간 경기를 준비하고 왔다”며 “당장 피트니스 프로그램을 바꿔야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33세 베테랑의 체력이 파릇파릇한 23세 신예들의 그것보다 한참을 앞섰던 것이다.

나달은 이번 우승으로 그랜드슬램 19번째 트로피를 수집하며 역대 최다인 페더러(20회)를 턱밑 끝까지 추격했다. 지난해 호주 오픈 우승 이후 메이저 대회 결승조차 올라가지 못한 페더러라 1, 2년 사이 나달이 타이틀을 가져올 가능성도 높아졌다.

나달은 클레이 대회에서만 강한 반쪽짜리 선수라는 오명도 씻어냈다. 하드코트 대회인 US오픈 4회 우승(2010, 13, 17, 19년)을 차지하며, 대회 최다 우승(5회)의 지미 코너스, 피트 샘프러스(이상 은퇴ㆍ미국), 페더러의 바로 다음 자리를 차지했다.

다닐 메드베데프가 9일 미국 뉴욕의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열린 US오픈 남자 단식 결승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뒤 관중들의 환호 소리를 즐기고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나달의 우승이 더 빛날 수 있었던 이유는 ‘최고의 악역’ 메드베데프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다. 생애 첫 그랜드슬램 결승 진출과 함께 우승을 노렸던 메드베데프는 이번 대회 내내 관중들의 야유에 시달렸다. 볼보이로부터 수건을 거칠게 잡아채는 비매너와 관중들을 향한 손가락 욕설, “당신들이 야유할수록 나는 계속 이기겠다”는 신경질적인 인터뷰 내용 등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것이다.

하지만 메드베데프는 팬들에게 최고의 게임을 선사하며 아유를 찬사로 바꿨다. 세트스코어 0-2로 뒤지던 3세트 중반 “0-3으로 지면 시상식에서 또 야유가 쏟아질 텐데 어떻게 준우승 소감을 말해야 될까 고민했다”던 그는 “하나씩 해보자”는 마음으로 두 세트를 따라 붙었다. 결국 5세트를 내줬지만 관중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메드베데프의 이름을 연호하며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알렸다. 메드베데프는 세계랭킹을 4위까지 끌어올리며 ‘빅3’를 위협할 차기 남자테니스 대권 후보로 단숨에 떠올랐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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