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동굴

입력
2019.09.10 04:40
31면
대체 왜 그렇게 짱 박히려고 하니?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뭘 하려고? 꿈을 꾸려면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대체 왜 그렇게 짱 박히려고 하니?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뭘 하려고? 꿈을 꾸려면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남자가 동굴에 들어가는 건 현실을 도피하는 것뿐이에요. 무책임한 거죠.”

얼마 전 여자 후배가 단호하게 한 말이다. 그 후배는 내 친구의 부인이기도 한데 가끔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찾아와 하소연을 하곤 한다. 그날도 한바탕 한 후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 말이 시발점이 되어 우리는 한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만큼 남자와 여자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만드는 단어 중 하나가 동굴일 것이다. 나는 미혼이기 때문에 이 문제로 이성과 심각하게 다툰 적이 없다. 하지만 나에게 동굴은 그 어떤 단어보다도 가슴에 와 닿는 단어다. 동굴은 다른 말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다. 동굴에 들어가는 남자들은 저마다의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후배의 말마따나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고, 어떤 이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에게 동굴이 필요한 이유는 꿈을 꾸기 위해서이다.

내가 처음으로 동굴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곳은 군대였다. 어린 나이에 입대라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 동등하지 않은 상하복종 관계 속에서 고립된 사회 속으로의 편입은 누구도 마음 편하지 않으리라. 예상대로 이등병 시절은 고난과 역경 그 자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힘든 훈련과 고참들의 얼차려보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혼자만의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군대를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곳은 아침 기상부터 9시 취침 때까지 단 한 순간도 혼자만의 시간이 없다. 심지어 이등병은 탈영 위험이 있기에 더더욱 혼자 두지 않는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나자 나는 거의 멘탈이 붕괴되기 직전에 이르렀다. 극단에 이른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식사를 빼먹고 화장실에 틀어 박혀있기도 했고, 심지어 빈 사무실에 숨어 있다가 잠이 들어 부대가 발칵 뒤집어지기도 했다. 결국 나는 문제 사병으로 찍혀 더 많은 관심과 시선을 받게 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게 됐다. 그러자 중대장이 면담을 하며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 짱박히려고 하니?’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뭘 하려고?’

‘꿈을 꾸려면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중대장은 외계인이라도 만난 표정을 지었다. 그 후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포기했다. 대신 다른 방법을 개발했다. 다리미질이었다. 그것은 당시 즐겨 읽던 한 소설가의 방법을 응용한 것인데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다리미질을 하는 동안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제대 후 내가 해야 할 일과 써야 할 이야기들. 십년 후 내 모습과 언젠가 이룰 나의 미래 등을 군복을 다리며 상상했다. 그렇게 나는 다리미질이라는 동굴을 찾은 것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다리미질을 한다. 물론 나에게는 집이라는 훌륭한 나만의 동굴이 있다. 하지만 가끔 동굴 속에서도 더 깊은 동굴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오래된 셔츠를 꺼내 정성스럽게 다리미질을 한다. 구석구석 주름 한 점 없이 펴지는 셔츠를 보며 꿈을 꾼다. 혹은 나만의 상념에 잠긴다. (비오는 날 아침 다리미질은 정말 멋진 일이다.)

여자 후배가 찾아오고 며칠 후 수순대로 남편인 내 친구가 찾아왔다. (가끔 나는 내가 일종의 게시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본래 입이 무겁기로 유명한 친구는 여느 때처럼 한동안 술잔만 기울였다. 그래서 내가 선수를 쳤다.

‘언제쯤 동굴에서 나올 생각이니?’

‘모르겠어. 생각이 정리되면.’

‘너무 오래 머물진 마라. 밖에 있는 사람, 생각도 해야지.’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미영이는 왜 동굴을 이해 못 할까?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미영이가 결혼한 건 굴 속의 곰이 아니라 너란 인간이니까. 이야기를 들어줘.’

‘곰은 집에 가련다.’

친구는 한숨을 쉬곤 마지막 잔을 비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정말 곰을 닮아 있었다.

장용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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