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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섭 고용노동부 근로감독정책단장이 지난 7월 31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재량근로시간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40년에 가까운 세월을 연구자로 살아왔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밤새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동이 틀 때가 되면 느꼈던 희열감, 열심히 만들어 놓은 파일이 날아갔을 때의 절망감, 쉴새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손에 쥐가 나서 멈춰야 했을 때 느낀 짜릿함까지 만감이 교차한다.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그때그때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고 연구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시간들이었다. 덕분에 만점짜리 남편, 아빠는 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해준 아내와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는 딸들이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이런 삶을 살아왔을 것이고 덕분에 우리 과학기술도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연구환경도 변화했다. 지난 7월 1일부터는 과학기술 연구기관에도 ‘주 40시간 근로제’가 도입되었다. 근로기준법이 개정되면서 연구개발업도 다른 직종과 같이 근로시간이 주 52시간으로 제한된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서 필요한 제도이지만, 연구몰입 환경을 저해할뿐더러, 연구문화가 붕괴될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국가과학기술연구회와 소관 연구기관들은 1년 전부터 대응책을 다각적으로 준비해왔다. 연구의 특성에 맞게 근무하는 방식을 다양화하기 위해 유연근무제 도입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그중에서도 장소, 시간, 업무수행방법에 구애받지 않고 연구자의 재량에 따라 근무할 수 있는 재량근로시간제 도입을 적극 추진했다.

재량근로시간제는 업무에 대한 수행방법과 시간배분을 근로자에게 완전히 위임하고 실제 근로한 시간에 관계없이 주 40시간을 근무한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이다. 이는 근로의 양보다 질이 중요한 연구업무에 가장 적합한 제도라 할 수 있다. 연구를 수행할 때는 언제, 어디서든 끊임없이 몰입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고, 이후에는 열심히 한 만큼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재량근로시간제 도입의 취지이다.

국내에는 아직 재량근로시간제의 구체적인 적용 사례가 없는 상황으로, 출연연이 이 제도의 최초 도입사례가 될 것이며, 그런 만큼 모범사례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제도를 잘 정비해 성공적으로 도입한다면 새로운 연구문화로 정착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 도입에 대해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대책도 함께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구현장에 일률적인 틀을 적용하기보다 연구라는 행위의 특성에 맞게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때는 출연연을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 불렀다. 연구자들의 연구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지금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되었다. 연구자에게도 가정과 휴식이 필요하고, 일과 삶이 균형을 이뤄야 창의적인 연구도 가능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이 꺼지지 않는 노동현장’이 아니라 ‘열정이 꺼지지 않는 연구 환경’이다. 연구는 노동이 아니며, 만일 연구가 노동이 된다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어둡다. 주 40시간 근로제가 대한민국 R&D의 위기가 될 것이라는 불필요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우리의 연구생산성을 높이고 선진국형 연구문화를 정착시키는 절호의 기회다.

원광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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