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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발전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점차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데, 이는 향후 형사사법 분야에 다양한 도전 과제를 던질 것이다. 인터넷 상용화 과정에서 기술과 법률의 간극으로 인해 발생했던 혼란을 떠올린다면 이에 대한 논의를 늦출 수는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속 성추행을 인정할 수 있을까? 이는 지난 2016년 10월 미국에서 가상현실 게임인 ‘퀴버(QuiVR)’를 즐기던 조던 벨라마이어(Jordan Belamire)라는 여성 유저가 게임 중에 성추행을 당했다는 글을 블로그에 게재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활을 쏘아 괴물들을 쓰러뜨려야 하는 게임 속에서 그녀는 높은 곳에 위치할 때에 극도의 공포를 체험하는 등 엄청난 몰입감을 느꼈다고 한다. 문제는 멀티 플레이어 모드에서 함께 게임을 하던 다른 유저가 다가와서 그녀의 아바타 가슴을 만지면서 시작되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벨라마이어는 실제로 자신은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는데, 게임 속 아바타에 대한 추행으로 인해 느낀 성적 수치심은 현실에서 경험했던 것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건 직후 퀴버의 개발자는 게임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이를 즐기는 이용자들은 가상현실 속에서 규제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논쟁이 쉽사리 잦아들지 않자 해당 업체는 자신의 아바타를 괴롭히는 다른 아바타를 튕겨낼 수 있는 기능을 게임에 추가하였다. 벨라마이어가 아바타를 통해 느낀 성적 수치심은 누군가로부터 업무용 이메일이나 채팅방을 통해 성희롱을 당했을 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 현행법상 성희롱은 업무나 고용 관계에서 성적인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했을 때에 인정되며, 형사처벌의 대상은 아니다.

이에 반해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추행한 경우에는 형법상 강제추행죄로 처벌될 수 있다. 즉 가상현실 속의 아바타가 아닌 유저인 사람을 대상으로 그 의사에 반해 신체를 접촉해서 성적 수치심을 야기했다면 강제추행죄가 성립될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다양한 정보를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여 전달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아바타를 매개로 사람에 대하여 강제추행을 하는 것이 불가능할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에 등장하는 의상처럼 게임 속 아바타에 대한 물리적 자극을 현실 속 유저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기술과 장비가 구현된다면 가상현실을 통해 벌어진 성희롱은 물론이고 강제추행도 인정될 여지가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점차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데, 이는 향후 형사사법 분야에 다양한 도전 과제를 던질 것이다. 인터넷 상용화 과정에서 기술과 법률의 간극으로 인해 발생했던 혼란을 떠올린다면 이에 대한 논의를 늦출 수는 없다.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정보화 사회로 진입했던 초창기에는 종래 예상하지 못했던 컴퓨터관련 범죄들이 등장하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기존의 형법 규정만으로 신종범죄에 대처하는 것이 한계에 부딪히자 1995년 형법 개정을 통해 컴퓨터 등 정보처리장치를 이용한 사기죄와 업무방해죄 및 비밀침해죄 등이 신설되었다.

기술이 안정적으로 상용화된 이후에도 해당 기술의 파급효과나 그 활용 방법의 변화 등을 고려한 입법적 공백 여부가 지속적으로 점검되어야 한다. 인터넷 사용이 일상화된 이후에도 정보통신망을 통해 사람을 비방하는 명예훼손의 경우 매체의 특성을 반영해서 일반명예훼손죄보다 가중해서 처벌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인터넷이 가지는 시·공간적인 무제한성과 고도의 전파가능성으로 인해 피해가 막대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지적되었고, 이에 2001년 사이버 명예훼손죄가 신설되었다. 근래에는 매크로를 이용한 업무방해죄의 성립 여부가 주목받고 있다. 같은 명령어를 반복해서 자동적으로 일이 수행되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통해서 포털 사이트의 댓글을 조작하는 행위나 공연 티켓을 대량으로 구매한 후 재판매하는 행위에 대해 업무방해죄의 적용 여부가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는 가운데 국내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는 이른바 실시간 검색어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국힘내세요’, ‘법대로임명’, ‘보고있다정치검찰’ 등 후보자의 지지자들이 순위를 올려놓은 문구가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노출된 것이다. 이를 두고 한쪽에서는 온라인 캠페인 내지는 시민운동이라 칭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론 왜곡이라고 비판한다. 매크로를 이용한 조작이 아니라 다수의 개인이 자발적으로 입력한 결과라면 그 자체를 법적으로 문제 삼기는 어려울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현수막을 설치할 때에는 시민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생활환경이 고려되도록 근거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온라인 공간에서 실검을 통해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그 파급효과가 훨씬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포털 접속과 동시에 노출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정치세력은 물론이고 혐오표현을 일삼는 다양한 집단들이 이를 학습하여 실시간 검색 순위를 도배하는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피로하다. 이제는 말 많고 탈 많은 실검을 폐지하면서, 별도의 페이지를 통해 검색어 통계를 제공하는 방안이 전향적으로 검토되기를 기대해 본다.

윤지영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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