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종자전쟁, 공정 경쟁이 먼저다

입력
2019.09.05 18:37
수정
2019.09.06 16:0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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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13년의 연구 끝에 항암배추를 개발한 J사 P대표가 육종장에서 항암쌈채의 효능을 설명하고 있다. 항암쌈채는 그가 항암배추에 이어 개발한 자매품이다. 한덕동 기자
13년의 연구 끝에 항암배추를 개발한 J사 P대표가 육종장에서 항암쌈채의 효능을 설명하고 있다. 항암쌈채는 그가 항암배추에 이어 개발한 자매품이다. 한덕동 기자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 때 한일 네티즌 사이에 ‘딸기 종자’ 논쟁이 벌어졌었다. 여자 컬링 준결승에서 한국과 일본이 맞붙었을 때의 일이다. 하프 타임에 일본 선수들이 딸기를 맛있게 먹는 모습이 방송 화면에 포착됐고, 한 일본 선수는 시상식 인터뷰에서 “한국 딸기가 참 맛있다”고 했다. 이런 광경이 종자 선진국임을 자부하는 일본에겐 적잖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일본 농림수산성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일본에서 유출된 품종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발언했다. 어떤 일본 네티즌은 한술 더 떠 “한국이 일본 딸기를 훔쳤다”고 흥분하기도 했다. “생트집 잡는다”는 한국 네티즌의 반격을 시작으로, 온라인 상에서 딸기 씨앗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일본 선수들이 먹은 딸기는 국산 품종인 ‘설향’이다. 일제강점기 때 재배를 시작한 우리나라 딸기 품종은 거의 대부분이 일본산이었다. 2005년 설향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설향 등장으로 국내외 딸기 시장은 급반전된다. 2018년 말 현재 설향은 국내 딸기 재배면적의 95%를 점령했다. 아시아 시장에서도 일본 품종을 제치고 최고 인기 상품으로 떠올랐다.

한일 간 종자 논쟁을 다시 떠올린 건 우리 종자업계의 불공정 행태를 접하고서다. 토종 종자업체 J사를 통해 최근 확인한 국내 종자시장의 불공정 사례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중소기업인 J사는 ‘암탁배추(품종등록명)’란 신품종 배추를 2011년 개발했다. 이 신품종은 항암성분을 다량 함유해 일명 항암배추로 불렸다. 전문 기관의 성분 실험을 거쳐 항암 효과도 검증됐다. 세계 종자업계는 깜짝 놀랐고, 배추 농가들은 너도나도 이 신품종을 찾았다.

그런데 항암배추가 최고 인기 품종상을 받은 2014년 무렵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기업 종자업체가 생산하는 B, G품종이 항암배추로 어물쩍 둔갑해버린 것이다. J사가 뒤를 추적해봤지만 판매 방식이 교묘해 꼬리를 잡기 어려웠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항암배추를 검색하면 J사의 진짜 항암배추 사이에 대기업 품종들이 섞여 나와 혼란을 준다. 유튜브에는 B, G품종을 재배한 농민들이 항암배추라고 대놓고 홍보하는 영상물까지 올라와 있다.

억울한 J사는 4,5년 전부터 시정을 요구했지만, 해당 대기업은 “일부 종자판매상과 농가들이 한 일”이라고 발뺌할 뿐이다.

항암배추는 J사 대표 P씨가 13년 간 연구에 매진한 끝에 거둔 결실이다. 최고 품질의 한국산 종자를 갈구하며 긴 시간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인 그로서는 피눈물이 날 지경이다.

보다 못한 P씨는 최근 대기업의 횡포로 피해를 보고 있으니 당국이 대책을 세워달라는 호소문까지 냈다. 하지만 이런 사연은 J사 소재지인 충북에서조차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P씨는 우리 산업계에 만연한 불공정 관행을 일본의 수출 제재 조치 이후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종자 업계의 불공정 행태는 반도체 업계의 그것과 판박이라고도 했다. 그는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가 반도체 소재ㆍ부품 국산화를 저해한 것처럼, 종자 대기업의 횡포가 중소업체의 신품종 개발 의지를 꺾고 있다”고 탄식했다.

종자 산업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바로 식량 안보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고유 종자를 확보하려는 세계 각국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농산물 중 상당수는 여전히 외국산 품종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우리만의 품종을 개발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원천기술을 보유한 개발자와 기업의 권리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 기술력으로 당당하게 경쟁하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제발 기울어진 운동장부터 바로 잡아달라”는 P대표의 호소에 당국과 업계가 화답하길 바란다.

그래야 ‘종자 홀로서기’에 성공한 제2, 제3의 설향이 계속 나올 수 있다.

한덕동 기자 ddhan@hankookilbo.com

대전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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