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소장파가 없는 정당

입력
2019.09.03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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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2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2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건 상식에 어긋나는 상황이다. 만신창이가 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취임해 사법개혁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 모두가 걱정하는데도 여당에선 제동을 걸고 나서는 목소리가 없다. 조 후보자 딸의 입시특혜 의혹을 계기로 문재인 정부의 핵심기반인 20~40대와 여성층의 이탈이 감지되는데도 그렇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공정한 사회’를 약속한 촛불정부에 대한 기대가 뿌리째 흔들리는데 누구 하나 나서서 피를 토하는 절규가 없다. 젊은 여당의원들은 기이한 긴장과 침묵에 갇혀 머리를 숙이고 있다.

특히 여성층 이탈은 심각한 경고신호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과거의 여성유권자와 달리 촛불시위와 새 정부 출범 과정에서 여성층이 보수보다 진보 쪽에 집결한 것은 여론조사로 확인돼왔다. 양성평등과 자녀교육에 관심이 큰 여성층과 정유라 특혜에 분노했던 20,30대가 겪는 상실감이 현정권을 ‘3년차 징크스’에 몰아 넣고 있는 것이다.

여당 인사가 전하는 분위기는 어떤가. “다 입 다물고 있지만 지역구 당원, 지방의원, 당직자까지 제 주변사람들은 다 조국이 사퇴해야 한다고 말해요. 오히려 윤석열 검찰총장이 수사에 착수하길 잘했다고 생각하죠. 조국은 문재인정부 도덕성의 상징입니다. 검찰을 개혁한다는 사람이 본인은 놔두고 남들만 개혁한다는 게 말이 안되잖아요. 그런데 당이 이런 얘기를 절대 못하죠.” 친문 직계그룹 의원은 “민심의 분노가 약간 사그라든거 같긴 하지만… 당 지도부가 아닌 누구도 이 문제를 얘기할 수 없다”며 같은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

그렇다고 절대 밀려선 안 되는 진영싸움으로 치부한다고 뒷감당이 될 상황인가. 게다가 여권의 잠룡들이 몸을 사리면서 눈치경쟁을 하는 풍경은 대단히 실망스럽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SNS에서 조국 사태를 “비이성의 극치인 마녀사냥에 가깝다”고 했고, 김부겸 의원은 “검찰수사는 청문회 때까지 멈춰야 한다”고 엄호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대한민국 발전에 꼭 필요한 인물이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조국이 위선자, 피의자란 건 다 헛소리”라고 규정했다. 여론이 조 후보자 일가에 분노하는데도 진영논리를 위해 골수 지지층만 의식하는 이런 모습을 과연 차기 지도자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차라리 박용진 의원이 용감해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과거 ‘당내독재로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오자 “정치지도자는 누가 키워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커서 더 큰 지도자가 돼야 한다”며 자신의 정치이력을 설명하곤 했다. 대의와 정도를 당당히 걸어온 노무현도 그 토대에서 탄생했다. 한국 정치는 변화의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촛불을 들었던 민심은 그때처럼 새 정치를 갈망할 것이다. 여당 내 차기 리더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상황이 정리된 뒤 움직일 생각이라면 큰 꿈은 접는 편이 낫다. 가슴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절망하고 배신감에 떨고 있는데 우리끼리 또 다른 ‘태극기 부대’를 만드는 게 정권재창출에 도움이 될까. 진보의 위선을 만회하고 평등과 공정의 화두를 다시 세워주길 바라는데 맹렬 지지층에 볼모로 잡힌 ‘작은 정치’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소장파가 없고 역동성이 사라진 당은 미래가 없다. 시간이 많지 않다. 비주류가 없는 현 여당에선 친문 진영 내 결기있는 젊은 정치인들이 대안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탈하는 2030세대와 여성 지지층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기껏 내년 총선 때 ‘반일프레임’에 기대고 우리보다 나쁜 건 ‘박근혜·최순실 적폐세력’이니 그래도 저쪽이 우리보다 더 막장인 거 잊었냐는 식으로 연명할건가. 보수층만 총결집하고 중도개혁층은 여권에 실망해 투표장에 안 나오면 그때 땅을 치고 후회할건가. 여당이 자기변신에 나서야 할 분기점에 서있다.

박석원 정치부 차장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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