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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 뱅크시 

※ 경제학자는 그림을 보면서 그림 값이나 화가의 수입을 가장 궁금해할 거라 짐작하는 분들이 많겠죠. 하지만 어떤 경제학자는 그림이 그려진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생각해보곤 한답니다. 그림 속에서 경제학 이론이나 원리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하죠. 미술과 경제학이 교감할 때의 흥분과 감동을 함께 나누고픈 경제학자,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지난해 10월5일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뱅크시의 회화 작품 ‘풍선과 소녀’(오른쪽 사진)가 낙찰 직후 작가가 액자에 몰래 설치한 분쇄기에 의해 찢어지고 있다. 뱅크시 인스타그램

2018년 10월5일 런던 소더비 경매장. 현대미술 경매에 나온 작품 한 점이 104만2,000파운드(약 15억4,000만원)에 낙찰되자마자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어져 파손되었다. 그 작품은 길거리 화가로 잘 알려진 뱅크시(Banksy)의 ‘풍선과 소녀(Girl With Balloon)’로, 당시는 그의 작품이 최고가를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작가 뱅크시는 작품을 만들 때 미리 그림 액자에 분쇄기를 설치해 두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이 낙찰되는 순간 리모콘을 이용해서 작품을 파쇄해 버린 것이다.

소더비 운영진과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과연 낙찰 받은 사람이 이미 파손되어버린 작품에 대하여 어떤 선택을 할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경매 규정상 구매자는 구입을 철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전화로 참여한 이 낙찰자는 정해진 낙찰금액에 이 찢겨진 그림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여성으로 알려진 낙찰자는 “처음에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결국 예술 역사의 한 조각을 갖기로 했다”고 말했다고 BBC는 보도했다.

 ◇찢어진 그림이 15억원에 팔린 이유 

도대체 예술작품은 작품 자체가 훼손되었는데도 그 경제적 가치가 유지되거나 오히려 상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술작품의 가치는 어떻게 매겨지는 것인가?

일반 제조업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라면 훼손되거나 파손될 경우 당연히 경제적 가치가 소멸되어 가격이 폭락하거나 거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령 자동차를 새로 구입한 사람이 자동차 엔진이 불량이거나 파손된 사실을 발견한다면 당연히 환불을 요구하거나 다른 새 차로 바꿔달라고 할 것이다. 일반 시장에서 제품 가격은 바로 상품 가치를 반영한다.

그러나 예술품의 경우는 가격이 작품의 가치를 곧바로 반영하기 어렵다. 문화경제학자 존 러스킨(John Ruskin)의 가치론은 이런 경우에 유용하게 적용된다. 그에 의하면 예술 재화는 일반 소비재와 달리 소비로부터 얻어지는 사용가치(use value) 이외에 본원적인 가치(intrinsic value)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런 점에서 시장에서의 교환가치보다는 본원적인 고유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문제는 본원적 가치는 객관적으로 쉽게 측정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예술적 가치가 인정되더라도 시장에서 유통될 때 그 가치가 화폐적 가치로 환원되어 통용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즉 그것을 사려는 소비자들이 예술품의 본원적 가치를 이해하고 그에 상응하는 화폐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뱅크시 작품의 낙찰자는 바로 이러한 예술품의 속성을 이해하고 가치를 부여한 소비자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인정 받으려 기다릴 필요 없다” 

뱅크시는 흔히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 ‘게릴라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고 칭하는 그의 본명은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로, 1990년대 즈음부터 출신지인 영국 브리스톨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 번지수가 있게 마련인 거리 곳곳에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의 작품엔 모두 ‘주소’가 있다.

그는 독특하면서도 민주적인 예술 철학을 가지고 있다. 뱅크시는 이렇게 주장한다. “미술작품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동네의 좋은 벽(wall)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입장료를 낼 필요도 없다.” 따라서 뱅크시 그림의 가치는 다른 화가들처럼 미술시장이나 미술경매에서 매겨지지 않는다. 오로지 길거리 사람들에 의해 진정한 값어치를 평가 받는 것이다.

뱅크시는 2005년부터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몰래 걸어 두는, 일명 ‘도둑 전시’를 감행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여동생이 몇 해 전 ‘오빠 작품은 절대 루브르 같은 유명 미술관에 전시되지 못할 거야’라고 하기에 ‘그래? 내가 죽고 나서 미술관들이 내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지’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곧 행동에 들어가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 몰래 작품을 걸어놓고 나왔다. 런던 대영박물관에는 ‘카트 미는 원시인’ 그림을 도둑 전시했는데 8일간이나 전시되었음에도 박물관을 드나든 수많은 사람 중 아무도 작품 주인을 알아채지 못했고 결국 뱅크시가 직접 언급하고 난 후에야 알려지게 되었다.

2013년 뉴욕타임스는 ‘뱅크시’라고만 알려진 영국의 낙서화가가 관광객과 경비원들로 북적거리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근대미술관(MOMA), 브루클린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자기 작품을 초강력 본드로 벽에 붙여놓는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메트폴리탄 미술관에는 방독면을 쓴 여자 그림, 근대미술관에는 앤디 워홀을 패러디한 토마토 수프 깡통 그림을 걸었다.

뱅크시는 뉴욕에서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을 몰래 판매하는 깜짝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센트럴파크의 길거리 노점에서 노인이 대신 판매한 뱅크시의 스텐실 작품은 개당 60달러에 단 몇 개만 팔렸다. 뱅크시가 이 사실을 공개하자 사람들이 센트럴파크로 달려갔으나 이미 노점은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뱅크시가 지난해 8월 영국 켄트주 도버의 건물 담벼락에 그린 그림. 노동자가 망치와 정으로 유럽기의 별 하나를 제거하는 장면을 통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표현했다. EPA 연합뉴스
 ◇유머가 담뿍 밴 가차없는 풍자 

뱅크시는 정체를 숨기기 위하여 주로 이른 새벽에 재빨리 그림을 그리고 사라진다. 스텐실 기법을 이용하여 페인트를 빠르게 뿌리는 방식인데, 흑백의 명암 대비나 벽의 모양과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기발한 그림 수법은 그의 작업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의 익명성은 세간의 주목을 끌었고, 사람들은 그림이 전달하는 메시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뱅크시의 작품에는 권위 정치에 대한 거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부조리, 전쟁에 관한 풍자가 넘친다. 무엇보다도 그는 유머감각을 잃는 법이 없다. 작업을 마친 후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위치를 알리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전시를 진행했다.

영국 정부에서 그의 거리예술 활동을 인정하고 작가로 받아들이면서 브리스톨 현지의 벽화들은 당국의 관리 아래 작품 투어나 관광지 상품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요 활동 무대인 런던에서도 그의 그림의 흔적을 좆는 ‘뱅크시 그래피티 투어’가 유행하고 있을 정도다.

사진작가 마틴 불의 ‘아트 테러리스트 뱅크시, 그래피티로 세상에 저항하다’라는 책은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뱅크시의 그래피티 작품을 투어 가이드 형식으로 담은 이 책에는 우산을 쓴 쥐, 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여인, 코를 킁킁대는 경찰관과 흰 선, 카펫 아래를 쓸고 있는 혹스턴 모텔의 청소부 등 그의 대표작 100여 점이 수록돼 있다. 이들 작품에는 뱅크시가 불합리한 세상에 외치는 불편한 잔실이 담겨 있다.

 ◇그래피티로 실천한 창조적 파괴 

뱅크시는 경매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파쇄한 행위를 피카소의 말을 빌려 이렇게 옹호했다. “파괴하려는 충동 또한 창조적인 충동이다.”(The urge to destroy is also a creative urge) 즉, 파괴 행위는 또 다른 창조를 낳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사를 쓴 슘페터(Joseph Schumpeter)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성숙기에 접어들게 되면 이윤률이 하락하고 새로운 이윤 창출이 어렵게 되기 때문에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경제 발전에 중요하다고 설파하였다. 기존의 기업 조직이나 설비를 타파하고 새롭게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고, 이것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뱅크시는 이러한 기업가정신에 투철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매에 나왔던 작품 ‘풍선과 소녀’는 파쇄된 이후 ‘쓰레기통 속의 사랑(Love is in the Bin)’이라는 새로운 작품명을 얻었다. 소더비 경매의 현대미술 책임자는 이 작품에 대해서 “경매 도중 창조된 역사상 첫 예술품”이라고 가치를 부여했다. 뱅크시는 낙서쯤으로 취급받던 벽화를 예술로 승화시키고 권력과 제도를 풍자하는 거리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이제는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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