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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남자 핸드볼 에이스 정의경과 에이스가 되고픈 김정우

※ 어린 운동 선수들은 꿈을 먹고 자랍니다. 박찬호, 박세리, 김연아를 보고 자란 선수들이 있어 한국 스포츠는 크게 성장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여전히 스타의 발자취를 따라 걷습니다. <한국일보>는 어린 선수들이 자신의 롤모델인 스타를 직접 만나 궁금한 것을 묻고 함께 희망을 키워가는 시리즈를 격주 목요일 연재합니다.
남자 핸드볼 국가대표 정의경이 지난 6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 내 핸드볼 훈련장에서 김정우 군의 슛 동작을 교정해 주고 있다. 류효진 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6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 내 핸드볼 훈련장. 핸드볼 꿈나무 김정우(15ㆍ구미 선산중)군은 “국가대표는 어떻게 훈련하는지 궁금했다”면서 신기한 듯 훈련 장비와 시설 등 곳곳을 둘러봤다. 이날은 정우가 평소 “정말 뵙고 싶었다”던 한국 남자 핸드볼 에이스 정의경(34ㆍ두산)을 만나는 날. 김정우는 “정의경 선수를 보려 창원에서 새벽 열차를 타고 올라왔다”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의경이 이끄는 ‘절대 강자’ 두산은 지난 2018~19시즌 사상 처음으로 정규리그 20경기와 챔프전까지 22전 전승을 거두면서 ‘전승 통합 우승’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정의경은 정규리그ㆍ챔프전 ‘통합 MVP’에 올랐다. 대학(경희대)에 입학하기도 전에 대표팀에 발탁돼 15년이나 ‘에이스’ 자리를 지켰다.

김정우는 올해 전국소년체전에서 득점 2위(19골)에 올랐고, 태백산기에서는 공격 포인트 1위(득점 1위ㆍ47골, 도움 3위)를 기록한 미래의 주역이다. 하지만 막상 정의경이 나타나니, 긴장한 정우는 순간 얼어붙었다. 초면에도 격의 없이 동생처럼 대하는 정의경의 편안함에 정우의 마음은 금세 풀어졌고, 이내 마음에 담아둔 가장 큰 고민을 털어놨다.

“핸드볼이 좋지만 하기 싫을 때도 많아요. 형은 항상 에이스였으니 학창 시절 방황한 적이 없었죠?” 하지만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핸드볼이 싫어 가출을 밥 먹듯 했지. 대학 땐 다른 길로 빠질 뻔도 했어.” 그는 경희대 재학 시절 핸드볼이 싫어 도망 나왔는데, 용돈은 떨어지고 갈 데는 없어 나이트클럽 웨이터를 해볼까 하고 면접을 보러 갔다고 했다. 훤칠한 외모였지만 문전에서 퇴짜를 맞았다. 정의경은 “키(188㎝)가 너무 커서 떨어진 것 같다. 훈련장으로 돌아와 선배들에게 엄청나게 혼났다”며 웃었다.

고등학교 때는 권투로 전향할 뻔했다. 핸드볼이 싫어 가출한 뒤 권투를 하던 친구의 체육관에서 잠을 자다, 정의경의 체격 조건과 운동 신경을 알아본 체육관 코치에게 발목을 잡혔다. 정의경은 “훈련 한달 만에 권투 대회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는데, 핸드볼 코치님께 잡혀 질질 끌려오다시피 했다”면서 “강원 지역 권투 선수 명단을 핸드볼 코치님이 어떻게 아셨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죽으나 사나 핸드볼만 해야 할 운명”이라며 웃었다. 중학교 때는 공부에 집중했었고 필드하키에도 도전해 나름 좋은 성과도 냈지만, 결국 핸드볼 코트로 돌아왔다. “몸이 근질근질해서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더라고.” 정의경과 핸드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이자 애증의 관계였다.

키 얘기가 나온 김에 ‘키 크는 법’도 궁금했다. 정의경은 “최근 신체 조건이 점점 더 중요해 지고 있다”면서 “예전에는 아시아권의 키 작은 선수들이 ‘스피드 핸드볼’로 신장을 극복했지만, 요즘에는 키 큰 선수들도 빠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창 클 나이인데 근육 운동은 자제하고 많이 먹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이에 정우는 “점심으로 보쌈 2인분에 막국수, 만두까지 추가해서 먹었다”면서 웃었다.

남자 핸드볼 국가대표 정의경이 지난 6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 내 핸드볼 훈련장에서 김정우 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류효진 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중고생이 닮아야 할 선수’를 꼽아달라는 질문도 나왔다. 정의경은 “날 닮고 싶어서 여기 온 것 아니냐”라며 웃더니 2018시즌 득점왕 박광순(23ㆍ하남시청) 선수를 추천했다. 정의경은 “재능이 뛰어난데 귀를 닫고 자기 고집만 부리는 선수가 있다”면서 “하지만 박광순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선후배를 막론하고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던진다. 그 배우려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비법’을 꺼냈다. “너 핸드볼 잘하고 싶지. 잘 베껴야 해”. 김정우가 선뜻 이해하지 못하자, 정의경은 설명을 시작했다. “많은 경기를 보면서 그들의 장점을 따라 해 보고 자기 것으로 만들라는 거야. 내가 새로운 기술을 만들려면 머리 아프잖아. 딱 10명의 장점만 베끼자고 생각해. 훌륭한 선수들의 기술엔 저작권이 없거든”. 정의경은 지금도 어린 선수들의 경기 영상을 꼼꼼히 챙겨본다고 했다. 어린 후배들에게도 배울 게 있다는 게 정의경의 지론이다. “조금 잘한다고 그 자리에 머물러 안도하면 안돼.”

사실 한국 남자 핸드볼은 최근 각종 국제대회에서 고전하면서 위상이 많이 낮아졌다. 아시아남자핸드볼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2012년까지 1위를 독차지했지만, 2014년 5위, 2016년 6위로 쳐졌다. 정우가 이 부분을 당차게 헤집고 들어왔다. “요즘 국제 대회에서 대표팀 성적이 썩 좋지 않아요. 오랜 주장으로써 책임감을 느끼지 않나요?” 정의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면서 “맞다. 어떻게든 명예를 회복하고 싶은데 너무 속상하다”고 인정했다. 그는 “내가 대표팀 막내 때 한국은 ‘아시아의 맹주’였고, 올림픽 등 세계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면서 “그런데 내가 선배가 되고 주장을 맡으면서 성적이 많이 하락했다. 뜻대로 안돼서 많이 힘들고 무한 책임을 느낀다”고도 했다. “정우 네가 열심히 연습하고 성장해서 남자 핸드볼을 위기에서 구해줘. 진심으로 부탁한다.”

남자 핸드볼 에이스 정의경과 김정우군. 류효진 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국내 리그에서 앞만 보고 달린 나머지, 해외 리그에 진출하지 못한 점은 개인적으로 매우 아쉽다고 했다. “올림픽(베이징, 런던), 세계선수권(2009, 2011, 2013) 등에 출전해 이름을 알렸고, 기회도 여러 차례 있었는데 잡지 못했다”면서 “선배들의 좋은 해외 진출 사례를 이어 갔어야 했는데, 그 역시 내 앞에서 끊어진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혹시 네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놓치지 말라”고 귀띔했다.

1시간 남짓한 만남을 뒤로한 채 훈련장을 나선 정우의 얼굴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앞으로 핸드볼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조금 진지하게 해야겠어요. 5년쯤 뒤엔 이 자리에 국가대표 신분으로 꼭 다시 오겠습니다.”

진천=강주형 기자 cubi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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