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讀古典] 지식인의 허망한 초상, 이사(李斯)

입력
2019.08.26 18:00
수정
2019.08.26 18:51
29면
초(楚)나라의 말단 관리이던 이사(李斯)는 관청 변소에 가면 늘 쥐가 쪼르르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쥐들은 대변을 먹다가 인기척이 나면 내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관청 창고에 가보니 그곳의 쥐들은 느긋하게 쌀을 먹고 있었다. 이사(李斯)는 탄식했다. “사람이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인간의 운명도 본인의 재능에 따른다지만, 그보다는 그가 처한 장소와 위치가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게티이미지뱅크
초(楚)나라의 말단 관리이던 이사(李斯)는 관청 변소에 가면 늘 쥐가 쪼르르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쥐들은 대변을 먹다가 인기척이 나면 내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관청 창고에 가보니 그곳의 쥐들은 느긋하게 쌀을 먹고 있었다. 이사(李斯)는 탄식했다. “사람이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인간의 운명도 본인의 재능에 따른다지만, 그보다는 그가 처한 장소와 위치가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게티이미지뱅크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열전(列傳)’ 부분을 선호한다. 필자도 ‘열전’을 읽을 때면 만감이 교차한다. 사마천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시대를 호령하던 인물 대부분이 비극으로 생을 마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들의 비극은 스스로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기에 더욱 씁쓸하다. 진시황(秦始皇)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제국의 기초를 다진 이사(李斯). 그도 역시 한껏 권력을 누리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사열전’을 보면 첫머리에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 두 대목이 있다. 첫째 일화는 쥐에 관한 이야기이다. 초(楚)나라의 말단 관리이던 그는 관청 변소에 가면 늘 쥐가 쪼르르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쥐들은 대변을 먹다가 인기척이 나면 내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관청 창고에 가보니 그곳의 쥐들은 느긋하게 쌀을 먹고 있었다. 이사가 탄식했다. “사람이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인간의 운명도 본인의 재능에 따른다지만, 그보다는 그가 처한 장소와 위치가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사의 깨달음을 ‘쥐 철학’이라고 부른다. 중국어로는 ‘노서철학(老鼠哲學)이라고 한다. 잘 쓰이는 말이다. ‘쥐 철학’을 발판으로, 제왕을 위한 학문을 하겠다고 결심한 이사는 당대 최고 지식인 순자(荀子)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때의 그는 전국시대 말기 흔히 볼 수 있는 출세욕이 강한 유능한 청년인 셈이었다.

둘째 일화는 스승과의 이별 장면이다. 이사는 초나라에 있던 대학자 순자에게 제왕학을 배웠다. 대단한 수재라 스승의 학설을 금방 터득한 이사는 진나라의 기세가 천하 통일을 앞두고 있다고 판단하고 초나라를 떠나 진(秦)나라에 가기로 결정한다. 그가 순자에게 한 말은 대략 다음 같다. “지금 시국이야말로 저 같은 사람에게 절호의 기회입니다. 오랫동안 미천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변신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무능한 사람이며,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나 의롭지 못한 부귀는 뜬 구름 같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사가 못 견딘 것은 낮은 직급이고 원하는 것은 출세일 뿐이었다. 스승에게 감사의 말로 석별의 정을 나누기는커녕, 유학자인 순자에게 공자의 가르침을 통박한 것에서 그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확연히 드러난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가 이사의 처세술인 셈이다. 중국에서는 ‘득시물태(得時勿怠)’라고 한다.

진나라로 건너간 이사는 여불위(呂不韋)의 가신으로 출발하여 수완을 발휘한다. 우선 진나라에 대항하는 6국의 제후와 명사들에 대한 회유 협박을 정책으로 건의했다. 동시에 서로를 이간시키는 정책을 진행하였다. 음험한 그의 정책은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다. 그 공으로 승승장구하여 법무대신에 임명된다. 여불위가 실각하자, 마침내 이사는 승상(丞相)이 되었다.

BC221년, 천하가 통일되자 이사의 권세는 절정에 달했다. 아들은 모두 황제의 사위가 되고, 딸은 모두 황제의 며느리가 되었다. 하루는 지방 장관인 큰아들 이유가 도성의 본가에 왔다. 그때 이사의 집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하객의 마차가 수 천여 대에 이르렀다.

시황제는 나이가 들어 괴팍해지면서 비위를 잘 맞추는 신하를 편애했다. 그중 조고가 가장 총애를 받았다. 조고는 환관이지만 법률을 공부하여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막내아들 호해의 선생으로 삼았다. BC210년, 진시황은 빈사의 상태에서, 북방에서 몽염 장군과 함께 있던 큰 아들 부소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도성에 와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조서가 발표되기 전에 시황제는 죽었다. 문제는 유조(遺詔)를 받은 사람이 조고였다는 것이다.

조고는 누가 후계자가 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알았다. 호해와 야합한 뒤, 이사를 설득한다. 뜻밖의 제안에 이사는 처음에는 펄쩍 뛰며 반대했다. 그러나 조고는 이사의 사람됨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조고는 이사에게 부소가 황제가 되면 몽염 장군이 승상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킨 뒤, 부소가 이사를 어떻게 생각할지, 승상의 자리에서 밀려나면 어떤 종말이 기다릴지 경고한다. 이사는 원칙대로 하면 조고가 해칠까 두려웠고, 부소가 황제가 되면 승상에서 쫓겨날까 두려웠다. 결국 이사는 호해를 황제로 만드는 역모에 동참했다. 자신의 득실을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다. 호해가 황제가 된 뒤, 이사는 조고의 덫에 빠져 역적으로 처형된다. 이사가 죽고 2년 뒤, 진나라가 망했다. 이사의 과도한 사익 추구가 자신도 망치고 나라도 망친 셈이다. ‘이사열전’ 말미에 이런 말이 있다. ‘세간에서 이사를 동정하는 모양인데 나는 가엾게만 볼 수 없다.’ 정치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이야기다.

공자가 말했다. ‘비열한 사람과 함께 임금을 모실 수는 없다. 이익을 얻지 못했을 때는 이익을 챙기려고 안달하고, 일단 이익을 챙기면 이익을 잃을까봐 또 안달한다. 이익을 잃을까 안달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감히 저지르기 때문이다.’

박성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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