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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합니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에게 주목합니다. ‘가만한’은 ‘움직임 따위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뜻입니다. ‘가만한 당신’은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대니얼 캘러핸은 생명윤리 전문 연구소 '헤이스팅스센터'를 설립한 사회사상가이자 개혁가다. 그는 1969년 생의 한 가운데에서 가톨릭 모태신앙을 등지며 낙태 권리를 앞장서 옹호했고, 이후 평생 의료 과학기술 진보의 전위에서 생명 윤리의 다양한 이슈들과 씨름했다. 그는 보수-자유주의의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고 우군 삼지도 않으면서 두 진영의 접점을 찾고자 했다. 그 접점이란 한 마디로 삶의 양이 아닌 질, 공리적으로 말하자면 생명 존엄 총량의 확대였다. 헤이스팅스센터 사진.

1940년대 미 국립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을 맡아 핵개발 계획(맨해튼 프로젝트)을 이끈 이론물리학자 오펜하이머(1904~1967)는 전후 자신(들)이 바꿔놓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책임감을 여러 차례 피력했다. 회고록에도 이렇게 썼다. “(대개 과학자란) 기술적으로 매력 적인 걸 보면 일단 달려들고 본다. 정작 그걸로 무엇을 할(수 있을)지 따져 보는 건 실험에 성공한 뒤다. 원자폭탄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의 반성은 과학자의 책임윤리, 그리고 그 취약성을 일깨우는 섬뜩한 예로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성찰은, 냉전의 축을 지탱한 국가 주도 거대 과학시스템보다 60년대 시민권운동과 히피 문화 속에, 그들의 윤리와 이념 안에 더 넓게 자리잡았다.

생명윤리(Bioethics)’의 물길도 거기서 솟구쳤다. 독일 신학자 겸 교사 프리츠 야르(Fritz Jahr, 1895~1953)가 1926년 한 에세이(‘Science of Life and Moral Doctrine’)에서 처음 썼다는 ‘생명윤리’란 말의 골자는 실험 동ㆍ식물의 가치를 부각하는 거였지만, 1970년 저 말을 되살린 미국의 생화학자겸 종양학자 반 렌셀러 포터(Van Rensselaer Potter(1911~2001)에겐 “생명과학과 보건 의료 영역의 인간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이자 "평가기준을 연구하는 학제통합적 학문”(‘삶, 그리고 생명윤리’ 이마이 미치오 지음)이었다.

갓 실용화한 경구 피임약, 장기이식과 산소호흡 같은 연명치료술, 태아 진단 등 출산과 수명 연장의 전 영역에 걸친 다양한 혁신들로, 또 기대로, 세상이 들떠가던 때였다. 보수 종교계의 도그마적 주장과 다른 차원의 윤리적 질문들도 철학적, 문화ㆍ사회적 맥락 안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들은 의료계뿐 아니라 여러 분야 연구자들이, 동시대 시민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포터는 생명 윤리(학)를 ‘미래를 향한 가교(Bridge to the Future)’이자 ‘살아남기의 과학(Science of Survival)’이라 말했다.

포터와 같은 문제의식에 치열했던 이가 여럿 있었다.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영향력 있는 가톨릭 평신도 잡지 ‘커먼윌 Commonweal’의 편집장(1961~68)으로 일하던 대니얼 캘러핸(Daniel Callahan)이 그 중 한 명이었다. 포터가 병원과 연구실에서 부딪치던 생명윤리의 문제들을 캘러핸은 종교 관련 글을 쓰고 편집하면서 끊임없이 대면해야 했다. 60년대는 가톨릭 교회로서도 ‘제2차 공의회(1962~65)’의 탈형식-탈권위의 격변기였다.

당시 커먼윌은 자유주의 평신도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바티칸의 주교들을 외곽에서 압박했다. 캘러핸은 잡지와 별도로, 피임과 교회의 정직성 등 현안을 주제로 단행본 9권을 직접 쓰거나 엮었다. 종교사학자 로저 앨런(Roger V. Allen)의 평가에 따르면 캘러핸은 “1960년대 가톨릭의 가장 영향력 있는 평신도”였다.

1968년 캘러핸은 크리스마스 파티 도중 친구이자 이웃인 정신과 의사 윌러드 게일린(Willard Gaylin)과 의기투합, 이듬해 잡지사에 사표를 내고 자기 집 지하실에 연구소를 차렸다. ‘생명 윤리’란 말보다 앞서 문을 연 생명윤리 전문연구소 ‘헤이스팅스센터(hastings Center)’였다. 7남매의 가난한 아버지로선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배교한 터여서 교단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고, 마찬가지 이유로 가톨릭 신자 아내의 응원을 기대하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그는 맨 먼저 장모에게 250달러를 빌려 센터 이름을 명기한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주문했다. 록펠러나 포드 재단 같은 곳에 기금요청서라도 내려면 우선 그럴싸해 보여야 했기 때문이었다.(commonwealmagazine.org)

만 50년이 지난 오늘날 헤이스팅스센터는 세계적 권위의 생명윤리 독립 연구기관으로 성장했다. 그 사이 그와 ‘센터’는, 현 센터 대표 밀드레드 솔로몬(Mildred Solomon)의 말처럼 ‘전례 없는 바이오 파워 시대’를 앞서 살며, 근년의 대리모 문제와 유전자편집조작술(CRISPR) 등이 품은 까다로운 윤리적 질문들을 찾고 답을 모색했다. 의료 과학기술의 미래를 낙관하며 질주하기 바쁜 이들에게 그는 성가신 훼방꾼이었다. 또 그런 의료 과학계의 기적의 청사진에 매료된 대중들, 돈이 있든 없든 스스로를 잠재적 수혜자라 여기는 대다수에게 그는 야속하고 짜증스러운 존재였다.

자서전에 밝힌 바, 그의 윤리의 핵심은 “인간의 유한성(finitude), 즉 질병과 고통, 노화, 죽음에 대한 성찰적 수용”이었고, 그 유한자적 조건에 대한 과학ㆍ의학 기술의 ‘과도한’ 개입을 경계하는 거였다. 그는 생명과 수명이 절대선이 아니며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게 한 선구적이고도 전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47권의 책을 쓰거나 공동 집필하거나 엮었다. 단독 저자로 출간한 책만 17권이었고, 그 중 9권으론 큰 상을 탔다. 1987년 퓰리처상 논픽션 최종심에 오른 ‘한도 설정(Setting Limits: Medical Goals in an Aging Society)’처럼 대개는 뜨거운 논란을 낳았다. 저 책에서 그는 “나이를 기준으로 연명 치료의 합리적 제한을 두자”고 제안했다. 목숨만 이어두는 게 능사도 아니고, 유한한 의료 보건 자원의 세대별 합리적 분배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게 주장의 근거였다. 그는 “제대로 된 질문은 우리가 노인세대에게 얼마나 더 긴 생명을 보장해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노년의 삶을 품위 있고 명예롭게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느냐이다”라고 썼다.

그는 호된 비판에 시달렸다. 다수는 ‘늙은 X은 죽든 말든 내버려두라는 말이냐’는 투의 거친 말로 그를 몰아세웠다. 서로 잘 알고 지냈을 의료윤리학자 래리 처칠(Larry Churchill)은 잡지 ‘Ethics’ 기고문에다 “(캘러핸은) 공리주의적 원칙에 입각해 노인의 수동적 안락사를 옹호하는 염세주의자”라 썼다. 3년 뒤 캘러핸은 속편 격인 책 ‘어떤 삶인가 What kind of Life: The Limits of Medical Progress’에서, 미국 전역에 산재한 첨단(world-class) 조산아 집중치료시설(ICU)과 병원 지척에 방치되다시피 널린 공립학교들의 열악한 여건을 대비하며 이렇게 썼다. “엄청난 양의 자원을 들여 저 작디작은(smaller and smaller) 생명들을 구해 놓고, 그들을 저 엉망진창인(second-and third- rate) 학교에 몰아넣는 사회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가?”(WP) 뉴욕대 의대 생명윤리학자 아서 캐플란(Arthur Caplan)은 “캘러핸이 말하고자 한 것은(…) (한껏 누리고 삶에서 더 추구할 바도 없는) 노인들이 청년 세대가 누려야 할 기회를 박탈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였다”고 변호했다. 2016년 인터뷰에서 캘러핸은 “좌파와 우파 모두가, 대부분 책도 읽지 않고 나를 공격했다. 그들에겐 논란이 되는 책이란 미디어에 소개되는 내용만 알면 되는 책일 뿐이었다. 나는 ‘지금’이 아니라 미래를 이야기하려 했는데, 그들은 내가 할머니를 당장 죽이려 든다고 여겼다. 심지어 아내에게 ‘나치와 결혼한 삶이 어떠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고 말했다.

캘러핸은 교회가 영생의 약속으로 신도를 모으듯, 의ㆍ과학계가 생명 연장의 청사진으로 제한적 사회자본의 몫을 과도하게 챙겨간다고 여겼다. 그는 시민들이 과학의 복음에 도취된 채 삶의 질과 존엄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치매 환자 간병 모습이다. 헤이스팅스센터.

과학의 자율 정화능력을 한껏 신뢰해온 리버테리언 과학저술가 로널드 베일리(Ronald Bailey, 1953~)는, 생명윤리의 여러 이슈를 두고 캘러핸과 맞서온 대표적인 이다. 그 둘이 2007년 ‘Do We Need Death?’라는 문제를 두고 공개 논쟁을 벌였다. 캘러핸의 답은 ‘단호한 Yes’였다. 개체의 노화와 죽음으로 종의 유지와 진화가 가능하다는 진화의 원리를 그는 근거 삼았다. “나는 인류가 자연의 저 원리보다 나은 시나리오를 발견하리라 생각할 수 없다.” 베일리의 답은 물론 “No”였다. “유전자와 진화, 환경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인류의 본성과 존엄을 가장 고차원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reason.com)

미 연방정부는 1991년 12월 ‘환자자기결정법(PSDA)’을 시행하며, 의사능력이 있는 시민이 미리 연명치료 포기 의사를 밝히는 ‘사전지시서(Advanced Directive 또는 Living Will)’의 법적 효력을 인정했다. 최근 헤이스팅스센터는 치매 환자의 죽을 권리에 대한 연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치매환자의 경우, 숫자는 급증하고 있지만 ‘사전지시서’로 거부하거나 포기할 연명의료 서비스가 없고, 미국 9개 주가 허용한 조력자살의 범주에서도 배제돼 있다.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해, 그에 따른 윤리적 문제에 대해 새로운 판단이 필요하다고 연구소측은 밝혔다.(thehastingscenter.org) 스스로는 끝내, 다수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캘러핸 같은 이들 덕에 우리는 얼마간 선택의 기회를 얻게 됐고, 마지막 존엄의 희망이나마 품을 수 있게 됐다.

대니얼 캘러핸은 1930년 7월 19일 워싱턴D.C에서 태어났다. 저널리스트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고, 그는 교회 부설 초중등학교를 거쳐 수영 특기 장학생으로 예일대에 진학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 국방부 정보부대에서 복무했고, 제대 후 조지타운대(57년 석사)와 하버드대(65년 박사)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50년대 분석철학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하버드 시절에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세례 속에 주로 신학서를 읽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커먼윌스 편집장이기도 했다.

잡지를 그만둘 무렵 그는 확고한 배교자였다. 특별한 계기로 인한 갑작스러운 회심이 아니라 장기간 서서히 그리 됐다고, 더 이상 종교적 신성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고 한다. 가장 크게 충격을 받은 건 아내였다. 브린모어대 재학 중 그를 만나 54년 결혼한 아내 시드니 캘러핸(Sidney DeShazo Callahan, 뉴욕 머시대 심리학과 교수)은 남편 영향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터였다. 둘은 “계획에 없던” 아이까지 모두 7남매를 낳아 6남매(1명은 유년에 사망)를 키우며, 예수회 잡지 ‘America’에 “신심 깊은 진정한 가톨릭 파워 커플”로 소개된 적도 있었다.

노년의 대니얼-시드니 캘러핸 부부. 배교자 남편과 가톨릭 신자 아내는 낙태문제 등을 두고 첨예하게 맞서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며 해로했다. 헤이스팅스센터 사진.

부부가 부딪친 첫 이슈는 ‘임신중단(낙태)’ 문제였다. 남편이 낙태 찬성론자로 선회한 거였다. 캘러핸은 포드 재단 지원으로 동유럽과 남미, 아시아 7개국 현지조사를 벌여 70년 ‘낙태: 법, 선택, 도덕(Abortion: Law, Choice, and Morality)’이란 책을 썼다. 500쪽 중 300쪽을 자료로 채운 그 책의 결론은 “여성의 권리가 태아의 권리보다 존중돼야 한다”는 거였다. 85년 인터뷰에서 그는, 자료를 찾고 책을 집필한 4년 동안 “우리는 거의 일상적으로 논쟁을 벌였다. 아내는 어깨 너머로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곤 했다. 아내가 이런저런 매체에 낙태 반대 요지의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내 강연 참석자들은 아내의 글을 가져와 나를 반박하곤 했다”고 말했다. 미 연방 대법원이 낙태를 합법화 하기(Roe v. Wade, 1973) 3년 전이었다.

캘러핸은 “나는 51% 낙태찬성론자”라고 말했다. 그만큼 낙태 반대론자들의 논거에 폭넓게 공감했고, 낙태를 개인 선택의 문제로 규정하고 윤리적 문제의식을 덮으려는 일부 찬성론자들의 입장에 반대했다. “완벽한 아이를 바라며 교정 가능한 문제들, 예컨대 구개열 같은 문제를 진단받은 태아조차 낙태하는 이들이 있다.” 페미니스트 진영 일각에서는 낙태에 윤리적 판단을 개입시킨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캘러핸 부부는 84년 낙태 찬반 논지를 담은 자신들과 여러 필자들의 에세이를 엮어 ‘낙태: 차이의 이해(Abortion: Understanding Differences)’란 책을 펴냈다. 대니얼은 당연히 낙태권을 두둔하면서도, 반대론을 두고 “외부로부터 주어진 비극적 요소를 삶의 일부로 기꺼이 수용하고 더불어 살겠다고 선택하는 의지”라고 정의했다. 그건 아내에 대한 신뢰와 이해, 그리고 깊은 존경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제는 동의할 수 없지만 추구하던 가치마저 하찮게 내팽개치지는 않는, 과거의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긍정과 연민이기도 했을 것이다. 낙태에 대한 그의 저런 입장은 낙태 찬반 진영 모두를 떨떠름하게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로서는, 예컨대 이념과 함께 윤리와 가치까지 저버리며 부와 자본, 권력에 수치심 없이 투항하는 한때의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배교자는 돼도 변절자는 되지 않겠다는 외로운 고집 같은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생명윤리의 이슈 대부분이 선악으로 잘라 나누기 힘든, ‘51대 49의 선택’의 범주 안에 있다. 캘러핸은 센터 운영 초기부터, 거의 모든 이슈에 대해 상반된 입장(연구자와 진영)을 모아 토론하며 접점을 찾는 방식을 고집했다. 예컨대 ‘행동 통제(behavior control) 이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전통적인 정신과 연구자와 뇌수술에 중점을 둔 정신외과(psychosurgery) 연구자를 마주 앉게 하는 식이었다.(voicesinbioethics.net) 생명윤리의 결론이 도달해야 할 51대 49의 자리, 그 흔들리는 가치의 접점을 모색하는 방법(론) 역시 유한자로서의 인간 한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그의 멋진 고집이었다.

2015년 하버드대 토론회 도중 그는 ‘품위를 잃지 않고 살려면 언제까지 사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요지의 질문에 “80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농담처럼 답했다. 그리곤 4년을 더 살고, 89번째 생일을 사흘 앞둔 지난 7월 16일 별세했다. 그 사이 그는 현대 사회 5대 위험(기후, 식량, 물, 만성질환, 비만)에 대한 성찰을 담은 생애 마지막 책 ‘The Five Horsemen of the modern World(2016)’을 펴냈다. 자칫 품위를 잃는 짓이 될 수 있는 자비 출판이 아니라, 컬럼비아대 출판부가 심사를 거쳐 낸 책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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