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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15일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만세삼창을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문 대통령과 김 여사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두루마기 한복을 입었다. 광복절 경축식이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건 2004년 이후 15년 만이다. 천안=류효진 기자

올해도 ‘동방경제포럼’에 한국 정상은 가지 않는다. 이낙연 국무총리를 대리 참석시킨 지난해에 이어 연속 불참이다. 이번에는 홍남기 경제부총리(기획재정부 장관)가 한국 대표다. 급(級)이 더 낮아졌다. 2015년부터 매년 9월 초쯤 아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고 있는 저 행사의 주최국은 러시아다. 대륙과 해양을 연결해보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교량 국가’ 구상과, ‘신(新)남방 정책’과 더불어 양대 액션 플랜인 ‘신북방 정책’의 핵심 국가다.

물론 그럴 사정과 ‘정무적’ 판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주변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다. 국가 간 가교가 되기를 바라는 나라의 정치 지도자에게는 분명 놓치기 아까운 소통 기회다. 경제 포럼으로 출범했지만 지금은 역내 외교ㆍ안보 현안까지 논의된다. 동북아시아의 유일한 정상급 다자 협의체여서다. “비행기로 2시간이면 갈 수 있을 정도로 거리도 가까운데 왜 안 가려 하는지 물어봐 주세요.” 최근 만난 한 전직 외교관이 안타까워하며 한 얘기다.

신냉전 구도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아니냐고들 한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다투고 남쪽의 한국ㆍ일본과 북쪽의 북한ㆍ러시아가 제가끔 전통 우방과의 공조를 강화하는 듯한 양상이 보이면서다. 하지만 해체된 전후 냉전 질서가 복원되기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퍼뜨린 ‘자국 우선주의’가 너무 커져버렸다. 19세기 영국 정치가 파머스턴의 아포리즘처럼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영원한 국가 이익만 있을 뿐이다’. 바야흐로 모두가 각개 약진하는 이전투구의 시대다.

실제 동북아 외교전은 치열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동방경제포럼을 건너뛴 적이 없다. 러시아와는 쿠릴 열도 4개 섬의 영유권을 놓고 불편한 사이인데도 4년째 매년 참석하고 있다. 부쩍 가까워지고 있는 중국과 일본도 세력 균형론의 반증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제국주의 시절 자국을 유린한 일본을 동병상련하던 한국보다 먼저 국빈 방문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70년 적대국 북한과 미국에게 더 이상 한국은 필수 중재자가 아니다. 중국 견제를 위해 미국ㆍ러시아가 손잡지 말라는 법도 없다. 현란한 합종연횡(合從連橫)이다.

강제나 타산을 통한 이익 추구가 대세인 요즘 ‘국제 정글’에서 문 대통령은 희소한 도덕의 지도자다. ‘스트롱맨’과 ‘비즈니스맨’ 틈에서 그는 위화감을 일으킨다. 마지막 냉전지에 겨우 해빙 기운이 감돌게 된 건 그의 신념과 집념 덕일 것이다. 어쩌면 소외는 대북(對北) 몰두의 필연적 귀결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글로벌 트렌드에서 아예 동떨어진 건 또 아니다. 세계화 부작용으로 지금 세계는 다시 민족국가 체제로 회귀 중이다. 문 대통령의 지상 과제는 온전한 민족국가 만들기인 것 같다. 마침 일본이 빌미를 제공했다. 다시 민족 대 민족이다. 일제로부터 한민족을 해방시키는 데 일조한 항일 민족주의가 소환된다. 그러나 한일 경제 전쟁을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벌이는 자와 치르는 자가 따로 있는 게 바로 전쟁이다(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조금만 견디라고? 당장 거꾸러질 서민 노동자나 중소기업에게는 한가한 소리다.

극일(克日)이 아니라 평화가 정의다. 독선에 기생하는 게 위선이다. ‘애국 아니면 이적(利敵)’이라며 전체주의적 선동의 선봉에 섰던 최측근의 몰락을 보는 문 대통령은 지금 어떤 심사일까. ‘인권 변호사 문재인’에게 어울리는 세상은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에 등장하는 국가 없이 자유로운 개인의 세상이어야 할 듯하다. 권력욕과 공명심 강한 참모들에게 그가 이용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권경성 정치부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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