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도박’ 같은 파생상품 판매한 은행에 뒷북 금감원

입력
2019.08.20 04:40
31면
금융감독원 청사 전경. 김주성기자
금융감독원 청사 전경. 김주성기자

국내에서 8,000억원어치가 넘게 팔린 파생금융상품으로 수천 명의 개인 투자자들이 대규모 원금 손실 위기에 몰렸다. 금융감독원은 올해 들어 주요국 장기금리가 급락하면서, 해외금리 연계 파생금융상품인 파생결합증권(DSL)과 파생결합펀드(DSF)의 손실률이 56~95%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2008년에 터진 ‘키코(KIKO) 사태’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온다.

문제가 된 파생상품은 미국ㆍ영국ㆍ독일 등의 장기 국채금리 변동을 바탕으로 금리가 일정 범위를 유지하면 이익을 얻는 옵션상품이다. 8,224억원어치가 팔린 상품의 96%는 우리은행과 KEB하나은행을 통해 판매됐다. 최소 가입금액이 1억원 이상으로, 개인 3,654명이 89%(금액기준)를 투자했고 평균 가입액은 2억원 정도라고 한다. 이중 판매 잔액 1,266억원어치인 독일 국채 연동상품은 예상 손실률이 95.1%인데, 만기가 9~11월이라 사실상 한 푼도 못 건질 가능성이 높다.

두 은행은 고객들에게 “주요국 국채에 투자하는 안전성 높은 상품으로 연 4~5%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고 설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상품은 국채가 아니라 국채금리 변동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것으로 금리가 일정 범위 밑으로 떨어지면 사실상 전액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게 피해자들 주장이다. 피해자를 대리해 집단소송을 준비 중인 법무법인은 “독일ㆍ영국 국채 금리 하락세가 뚜렷한 상황에도 은행들이 판매를 계속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도 “해당 상품의 불완전 판매 소지가 높다”고 보고 관련 금융기관에 대한 합동 검사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환율연동 파생상품에 가입했다 우량기업들이 3조원 이상의 손실을 보고 줄도산했던 ‘키코 사태’와 판박이라는 점에서 감독기관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옵션상품 본연의 기능은 ‘위험회피’로, 이를 안전한 투자 상품으로 판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KIKO 사태 이후에도 많은 금융기관이 도박이나 다름없는 옵션상품의 위험성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개인들에게 판매했지만, 당국은 방치했다. 책임소재를 분명히 규명하고 옵션상품 판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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