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싸워다오. 사죄를 받아다오’ 엄마의 못다한 소망 이루겠습니다”

입력
2019.08.14 11:00
수정
2019.08.14 14:38
구독
1992년 1월 13일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벌어진 ‘정신대 피해보상 요구 시위’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자 김학순 할머니가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신상순 기자
1992년 1월 13일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벌어진 ‘정신대 피해보상 요구 시위’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자 김학순 할머니가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신상순 기자

28년 전인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하면서 일제강점기의 끔찍한 전시성폭력 사실이 드러났다. 2012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는 이날을 ‘세계 위안부 기림일’ 로 지정했다. 우리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지난해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했다.

여성가족부는 제2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 기념식이 열리는 14일 ‘유족의 편지’를 공개했다.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물론 가족에게조차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지 못한 채 원한으로 가득 찬 생을 살다 간 어머니의 영혼을 달래는 자식들의 사모곡(思母曲)이다. 여성가족부는 유족들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길 바라지 않는 것을 고려해 유족 2명 이상의 이야기를 들은 뒤 이에 기반해 편지를 작성했다. 편지는 14일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리는 기념식에서 배우 한지민씨가 낭독했다.

지난 4일 또 한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별세하면서 생존자는 20명만 남았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생존자 240명 중 92%에 달하는 220명이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사망한 것이다. 생존자도 전부 85세 이상의 고령이며, 이들 중 절반 이상은 90세가 넘었다. 살아서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는 것이 생존자들의 소망이자 당연한 정의(正義)이지만, 일본 정부가 진실을 부인하는 사이 야속한 시간만 흐르고 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편지 전문]

‘위안부’였던, 나의 사랑하는 엄마에게

어린 시절,

또래의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는 평양이 고향이신데,

전쟁 때 다친 군인들을 치료하는 간호사였다고

우리 엄마는 참 훌륭한 분이라고 자랑을 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잠결에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엄마가 일본군 위안부로 있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게 뭔지 무슨 일을 겪으신 건지 저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1942년. 그러니까 엄마 나이 열일곱.

전쟁 때 다친 사람들을 간호하러 가신 게 아니구나…

누군가에게 강제로 끌려가 모진 고생을 하신거구나…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다친 어깨와 허리 때문에

팔을 들어 올리지도 못 하시는 엄마를 보면서도

무엇을 하다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으신 건지 엄마한테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이 무섭기만 했고,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우리 엄마가 겪은 일이라는 게 더 무섭고 싫기만 했습니다.

혹시라도 내 주변의 친구들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어쩌나 그저 두렵기만 했습니다.

13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청 평화의 소녀상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식'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헌화를 마친 후 소녀상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성남=연합뉴스
13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청 평화의 소녀상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식'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헌화를 마친 후 소녀상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성남=연합뉴스

엄마는 일본말도 잘 하시고 가끔은 영어를 쓰시기도 하셨지만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실 때는 전혀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디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마 얘기를 절대 해서는 안 된다며 제게도 항상 신신당부를 하시곤 했었죠.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아니, 어쩌면 저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애써 외면했어요.

제가 알게 된 엄마의 이야기를 모른 체 하고 싶었습니다.

철없는 저는 엄마가 부끄러웠습니다.

가엾은 우리 엄마.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그 깊은 슬픔과 고통을 안고 얼마나 힘드셨을지 가슴이 아파옵니다.

엄마.

엄마가 처음으로 수요 집회에 나갔던 때가 떠오릅니다.

처음엔 어디 가시는지조차 몰랐던 제가

그 뒤, 아픈 몸을 이끌고 미국과 일본까지 오가시는 것을 보면서

엄마가 겪은 참혹하고 처절했던 시간들에 대해 하나씩 하나씩

자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생전에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끝까지 싸워다오. 사죄를 받아다오.

그래야 죽어서도 원한 없이 땅 속에 묻혀 있을 것 같구나.

“이 세상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해.”

“다시는 나 같은 아픔이 없어야 해.”

엄마는 강한 분이셨어요.

그러나 엄마는 그렇게 바라던 진정한 사죄도, 어린 시절을 보상도 받지 못하시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이 고통과의 싸움이었을 엄마를 생각하며 저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엄마.

끝내 가슴에 커다란 응어리를 품고 가신 우리 엄마

모진 시간 잘 버텨내셨습니다.

이런 아픔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저희가 이어가겠습니다.

반드시 엄마의 못다한 소망을 이루어내겠습니다.

이제 모든 거 내려놓으시고 편안해지시길 소망합니다.

나의 어머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

사랑합니다.

7일 서울 용산구의 한 극장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김복동' 포스터가 걸려 있다. 연합뉴스
7일 서울 용산구의 한 극장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김복동' 포스터가 걸려 있다. 연합뉴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