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의 다시 광릉 숲에서] 서어나무 숲은 내게 ‘깃발’이다.

입력
2019.08.13 18:00
수정
2019.08.13 18:05
25면
서어나무 잎과 열매 (사진 국립수목원)
서어나무 잎과 열매 (사진 국립수목원)

서어나무는 자작나뭇과에 속하는 큰키나무입니다. 순림을 이루는 숲을 보기도 어렵고, 숲에서 이런 저런 나무들 사이에서 자라느라 올곧지 못해 특별한 쓰임새를 드러내지 않다 보니 서어나무를 알고 계신 분들은 많지는 않지만, 식물 하나하나 따져보는데 익숙한 제게는 숲이라는 공간과 그 숲을 만들어내는 시간의 개념을 심어준 의미 있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를 제대로 알고 보니 멀리 수많은 나무들 속에서도 이 나무를 알아볼 수 있는 새로운 경지(?)를 일깨워준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지요. 더욱 특별한 존재가 된 이유도 있습니다. 숲은 멈추어 서 있지 않고 변하는데 이를 천이(遷移)라고 하며 그 마지막 단계, 가장 안정된 숲을 극상림이라고 합니다. 제가 일하는 광릉숲 소리봉 일대는 보전의 역사가 수백 년에 이르다 보니 온대중부지방 전형적인 극상에 가까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서어나무가 그러한 숲을 이루는 대표적인 나무의 하나이니 언제나 서어나무 이야기를 하고 살았습니다.

세밀화로 그린 서어나무(사진 국립수목원)
세밀화로 그린 서어나무(사진 국립수목원)

그런데 오늘 질문을 하나 받았습니다. “서어나무숲은 내게 ○○○이다.”를 채워 넣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보고 말했던 나무이지만 막상 한 단어로 이 나무의 의미를 제게 정의하기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처음 생각난 단어는 ‘위로’였습니다. 서어나무가 자라는 숲길을 거니노라면 그 어떤 갈등, 억울함, 걱정과 같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점차 마음이 안정되어 스스로 정리해나갔던 제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어머니’였습니다. 서어나무가 있는 그 숲은 수백년 동안 자라고 죽기를 거듭하며 다른 풀과 나무들은 물론이며 다양한 새와 곤충들과 특별한 버섯들까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을 품어 안은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설렘’도 떠올랐습니다. 화려한 꽃이 피지 않은 나무이지만 붉은빛이 도는 새순에서 시작하여 주렁주렁 매달리는 은녹색의 수꽃차례, 그윽한 갈색빛 단풍, 작은 날개를 층층이 매단 열매들이 바스락 흩날리는 가을바람 속에선 세상의 시름일랑 다 잊고 더없이 행복해지지요. 여기에 울퉁불퉁한 근육을 보는 듯한 회색빛 줄기는 너무나 개성이 넘쳐 이 나무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광릉숲의 서어나무 (사진 국립수목원)
광릉숲의 서어나무 (사진 국립수목원)

이 많은 의미를 어느 한 단어로 대표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떠 옳은 말이 바로 ‘깃발’입니다. 서어나무는 언제나 다양한 모습과 가치를 가진 숲과 나무가 내게 무엇인지 자각하고 이끌어줍니다. 당장의 일에 갇혀 멀리 보지 못할 때 적어도 수백 년을 말하는 이 나무가, 넓고 크게 보지 못할 때 다른 생명들과 더불어 숲을 엮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나무가. 제 삶에서 찾고자 했던 일을 잠시 잊고 스스로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 그 만의 특별한 모습을 잊지 않고 매력을 품어내는 이 나무가. 깃발처럼 흩날리며 머뭇거리는 저를 일깨우고 가는 방향을 다시 보게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게 서어나무숲이 깃발이 되었듯 여러분의 삶에도 잊고 있던 스스로를 일깨워주고 독려해주는 깃발 하나를 세워 보시길 권합니다. 진실과 진정한 가치를 잃고 얽히고 얽혀가는 삶을 맴돌며 지쳐가는 일상에서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어딘가에 흩날리고 있을 여러분의 깃발을.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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