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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전원이 필요 없고 덥거나 추운 외부 환경에도 별 문제 없이 견딘다. 사용법은 매우 쉬워서 유치원생이라도 금방 익힐 수 있다. 담겨있는 정보는 어느 부분이든지 바로 열어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수명이 길어서 보관만 잘하면 최소 수백 년 이상은 너끈하다. 이 궁극의 정보단말기는 바로 책이다. ©게티이미지뱅크

90년대 초에 책을 한 권 번역해 낸 적이 있다. 그동안 절판 상태였다가 몇 년 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 제의를 받았다. 처음에 번역했던 원고 파일을 백업해 둔 기억이 있어서 그걸 찾아 보내주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백업을 찾고 나니 난감했다. 플로피 디스크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요즘 컴퓨터에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버가 달려 있지 않으니 파일을 읽어 낼 방법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구형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는 용산 전자상가의 어느 가게를 찾아갔다. 하지만 다시 한번 낭패. 그곳에 있던 컴퓨터의 디스크 드라이버는 3.5인치 디스켓용이었다. 백업해 둔 디스크는 구형인 5.25인치였으니 호환은 불가능했다. 결국 사람을 구해 예전 책의 내용을 모두 다시 타이핑하고 말았다.

현대는 이렇듯 과학기술의 세대교체 주기가 빠르다. 특히 정보통신 분야는 채 10년도 안 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지난 30여년간 사용했던 컴퓨터를 떠올려 보면 286(AT)에서 출발해 386, 486을 거쳐 펜티엄 I, II, III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뒤로는 뭐라고 불렀는지 생각도 나지 않고 사실 관심도 없다. 이제는 그저 습관적으로 몇 년마다 한 번씩 업그레이드하여 교체해 쓸 뿐이다.

요즘 젊은 세대, 구체적으로 말해 21세기에 태어나 자란 이들은 데스크톱PC라는 개념 자체도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것 같다. 스마트폰이 만능 정보단말기이다. 그 스마트폰도 몇 년에 한 번씩 세대교체가 일어난다. 과연 이런 추세는 계속 유효할까?

세계적인 SF작가였던 아이작 아시모프는 일찍이 궁극의 정보단말기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별도의 전원이 필요 없고 덥거나 추운 외부 환경에도 별 문제 없이 견딘다. 사용법은 매우 쉬워서 유치원생이라도 금방 익힐 수 있다. 담겨 있는 정보는 어느 부분이든지 바로 열어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수명이 길어서 보관만 잘하면 최소 수백 년 이상은 너끈하다.

이 궁극의 정보단말기는 바로 책이다. 저장 용량은 현대의 전자통신기기 메모리에 비길 수 없을 만큼 작지만 위에 열거한 장점들은 절대 우위다. 현대전에서 피할 수 없는 전자기폭풍(EMP)이 모든 전자기기들을 먹통으로 만들어도 책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중계통신망이 무너지고 전기가 끊기는 재난 상황에는 사실상 책 말고는 유용한 정보단말기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보단말기보다도 그걸 사용하는 우리 인간에게 드는 의문이 있다. 사실 호모 사피엔스는 각자 개인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 한계가 있는 건 아닐까?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은 세상의 정보량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켜 왔지만 그만큼 쓰레기 정보도 불어나고 있다. 이제 현대인이 갖춰야 할 덕목 중에는 양질의 정보와 쓰레기를 구별해 내는 안목도 필수다. 이를테면 가짜뉴스 등. 엊그제도 동창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 아베 총리의 조부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라는 엉터리 정보가 올라 왔다.

인간은 일정 수준을 넘어선 정보량을 접하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능력이 멈추고 확증 편향이라는 뒤틀린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만약 그렇다면 과학기술의 가속 발달로 정보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빅데이터 시대는 자칫 악몽으로 귀결될지도 모를 일이다.

21세기에 나고 자란 사람들은 활자 매체보다 동영상에 더 익숙한 인류역사상 첫 세대라 할 만하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유튜브를 제일 먼저 찾아본다. ‘구텐베르크 마인드가 저물어가는 시대’에 21세기 신인류는 과연 책과 스마트폰의 본질적인 차이를 깨달을까? 저장 용량의 차이는 사실 그걸 받아들이는 우리 인간의 수용 능력의 차이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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