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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영원한 청춘의 심벌 신성일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영화 '청춘 교실'(1963)은 신성일과 엄앵란을 내세운 청춘 영화로 '맨발의 청춘'의 빅히트를 예고하는 작품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가정교사’(1963) 촬영에 들어가면서 신성일은 ‘아낌없이 주련다’(1962) 때와는 180도 다른 이미지로 변신을 시도한다. 영화잡지 ‘스크린’에서 일본의 청춘 스타 이시하라 유지로의 스포츠머리를 접하고 강한 인상을 받았던 그는 극동흥업의 차태진 사장에게 “나 머리 깎습니다” 대뜸 말하고는 곧장 라이온스 호텔 1층의 이발소로 찾아가 그때까지의 긴 머리를 짧게 깎아버렸다. 한국 영화에서 배우가 처음으로 스포츠머리를 한 것이다. 다음날 그 모습을 본 김기덕 감독과 차 사장은 신성일의 변신에 흡족해하며 주인공 배역을 확정지었고, 영화는 대성공한다. 우수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도 두 눈을 번뜩이던 신성일의 캐릭터는 기성질서에 반항하는 젊은이의 우상이 되었고, 남자들 사이에서 스포츠머리가 일대 유행을 타 전국의 이발소에는 “신성일 머리로 해달라”는 요청이 쏟아지게 된다.

영화 '맨발의 청춘'의 포스터. 한국일보 자료사진
 ◇구름 관객 모은 ‘맨발의 청춘’ 

이 무렵 김수용 감독의 ’청춘교실‘(1963)로 신성일과 인연을 맺었던 한양영화사의 최현민 기획실장은 남몰래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 닛카쓰 영화사의 ‘흙탕 속의 순정‘(1963)을 가져다가 신봉승 작가의 각색을 거쳐 한국식으로 번안화한 작품이었다. 내심 신성일과 엄앵란을 적역으로 점찍어두고 있던 그는 두 사람을 만나 식사하는 자리에서 차기작의 구상을 밝혔다. “일본에서 히트한 작품이 있어. 남자는 뒷골목 젊은이고 여자는 대사의 딸이지. 결국 두 사람의 자살로 끝나는 이야기야. 딱 둘이서 하면 되겠다.” ’맨발의 청춘‘(1964)이었다. 그러나 최현민은 영화사에 정식으로 기획안을 넘기진 않았고, 신성일은 이 작품이 극동흥업 쪽에 더 알맞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엄앵란 또한 그 의견에 동의하면서 두 사람은 작품의 아이디어를 극동흥업에 넘기게 된다. 공들이던 기획을 도둑맞은 최현민과 신봉승 작가는 분통을 터뜨렸지만 이형표 감독의 ’말띠 여대생‘(1963)으로 방향을 수정하고 만다. 대신 신성일과 엄앵란 콤비는 ’말띠 여대생‘에도 주연으로 얼굴을 비추게 된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18일 만에 촬영을 마친 ’맨발의 청춘‘은 2월 29일 광화문 옆 아카데미 극장에서 개봉했다. 첫날부터 표를 사려는 관객들의 행렬이 덕수궁 문 앞에까지 이어지며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던 영화의 흥행세는 결과적으로 서울 관객 36만명을 동원하는 빅히트를 기록한다. 이 영화의 흥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아카데미 극장을 운영하던 방우영 조선일보 전무는 당시 돈으로 1억원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맨발의 청춘’을 상영해 거둔 수익만으로 전부 만회했다고 한다. ‘맨발의 청춘’은 한 편의 영화를 넘어 사회현상이었다. 멋쟁이들 사이에서는 신성일이 입고 있던 가죽점퍼와 청바지 패션, 트위스트 김의 트위스트 춤이 대대적인 유행을 일으켰고, 중소 영화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청춘’이 들어가는 영화에 달려들었다. 극장가에는 ‘엄앵란과 신성일이 주연한 청춘영화는 반드시 히트한다’는 흥행 공식이 생겼고, 신성일은 임권택 감독의 ‘욕망의 결산’(1964)을 비롯해 비슷한 유형의 영화를 그해에만 33편 찍으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한국형 스타 시스템의 효시였다.

신성일은 영화 '맨발의 청춘'을 통해 당대 젊은이들의 욕망과 좌절을 대변하는 청춘 심벌로 거듭났다.
영화 '맨발의 청춘'(1964)의 빅히트로 신성일은 청춘의 심벌이 됐고, 그가 입었던 가죽재킷과 청바지도 크게 유행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시대상과 맞닿았던 신성일 

신성일의 스타성은 당대 사회상과 관객의 정서에 맞물려 일어난 시대의 산물이었다. ‘청춘교실’과 ‘초연’(1966) 등에선 지적인 상류층 자제였지만 ‘맨발의 청춘’ ‘초우’(1966), ‘하숙생’ ‘위험한 청춘’이나 ‘떠날 때는 말없이’(1964) 등에선 정반대로 건달이나 가난한 고시생 등 사회 밑바닥 계층을 연기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하는 비극적인 운명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신성일의 인물들은 공통된다. 부유한 신성일은 보수적인 부모세대의 가치관과 갈등을 빚고, 가난한 신성일은 계급차를 뛰어넘는 사랑과 신분의 상승을 꿈꾸지만 종국에는 실패하고 만다. 기성 사회의 가치관에 저항하며 몸부림치지만 끝내 꺾이고 마는 비련의 청춘. 근대화와 산업화의 결과로 대거 도시로 상경해 힘겹게 살아가던 젊은이들은 그런 영화 속 신성일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았다. 부잣집 자제에게선 도시의 물질적 풍요를 선망하는 삶의 욕망을 투영했고, 하류인생 청년에게는 현실의 자기 처지를 떠올리며 감정을 이입하곤 했던 것이다.

유명세를 얻음에 따라 신성일의 몸값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아낌없이 주련다’에서 10만원이었던 출연료는 60년대 후반에 이르면 편당 70만~80만으로 뛰어올라 있었다. 그는 수입의 20~30%를 세금으로 냈는데 1965년에 낸 세금은 1분기에만 190만원이었고, 1968년 한 해 총 339만원을 납부했다. 이 금액은 고급 주택 한 채를 통째로 사고도 남는 액수였다. 사실상 신성일은 걸어 다니는 1인 기업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국세청에서 고액납세자에게 표창을 시작한 1965년부터 행사가 중단되는 1969년까지 연예계 납세왕의 타이틀은 줄곧 신성일의 것이었다. ‘맨발의 청춘’의 두수는 신분상승과 사랑에 실패한 채 죽음을 맞았지만, 현실의 신성일은 부와 명예를 거머쥐며 브레이크 없는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 또한 얻었다. 수 차례 연기 호흡을 맞췄던 엄앵란과의 결혼이었다.

영화 '맨발의 청춘'(1964)에서 연인을 연기한 엄앵란과 신성일은 이후 실제 연인으로 발전하고 결혼에 이르게 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돈과 명예 그리고 사랑까지 

‘로맨스 빠빠’(1960)에 출연할 때의 신성일은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어머니 앞에서 “엄앵란이 콧대 세고, 건방지다”며 흉을 보았다고 한다. 신성일이 막 데뷔했을 무렵, 엄앵란은 일찌감치 ‘단종애사’(1956)로 데뷔한 연상의 선배였다. 그러나 ‘새엄마’(1963)를 작업할 즈음에는 촬영 때마다 엄앵란이 후배 신성일의 도시락을 챙겨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어있었다. 정진우 감독의 ‘배신’(1964)을 찍고 있던 1963년 늦가을 무렵, 경기 가평군의 청평호로 로케이션을 나가있던 두 사람은 영화 촬영 도중에 진짜로 키스를 나눈다. ‘배신’은 조직의 보스 장동휘의 수행원인 신성일이 보스의 애첩 엄앵란과 몰래 사랑을 키워나간다는 내용의 영화였는데, 마지막 장면을 찍는 날 신성일은 직접 보트를 호수 한 가운데까지 몰았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몸을 밀착하면서 신성일은 나지막이 “미스 엄, 가만 있어봐” 말하고는 그대로 입을 맞췄고,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키스했다.

급진전된 두 사람의 관계에 쐐기를 박은 건 이듬해 늦봄,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을 그린 ‘대륙의 밀사’(1964) 때의 사고였다. 일본군에게 쫓기는 수상 추격 장면을 청평호에서 찍고 있었는데, 총탄이 수면에 맞아 튀기는 특수효과를 위해 설치한 수류탄 뇌관 파편이 엄앵란에게 날아가 얼굴을 찢어놓은 것이다. 응급치료를 받은 엄앵란은 신성일의 품에 안긴 채 을지로 5가의 외국계 병원으로 갔는데, 가는 내내 신성일은 자신도 엉덩이와 허벅지에 파편을 맞은 걸 몰랐다. 바지가 피범벅이 된 걸 발견한 건 병원에 도착한 뒤였다. 가까워진 두 사람은 촬영으로 바쁜 틈틈이 밀회를 가지며 연인으로 발전했고 그해 11월 14일 결혼에 골인한다. 워커힐 퍼시픽홀에 3,500여명의 하객이 몰려든 세기의 웨딩이었다. 그러나 신성일은 다른 여배우들과 숱한 염문을 뿌렸고,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2011)에서 과거의 여성편력을 밝혀 한바탕 구설수에 휩싸이게 된다.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에서 신성일의 청춘 연기는 정점을 이룬다. 지나치게 암울하고 퇴폐적인 내용이란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결말을 수정하라는 압력을 받은 이 영화는 제작자인 연합영화사의 전옥숙(홍상수 감독의 어머니) 대표가 상영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창고에서 썩게 된다. ‘휴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영상자료원에 의해 필름이 발굴된 2005년의 일이었다. 37년 전 신성일의 우울한 표정이 필름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주인공 허욱은 직장도 돈도 없는 무산계급 백수 청년으로, 커피 값이 없어 다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택시기사에게 사기를 치며, 애인의 임신 중절 수술비를 마련코자 사방을 전전하다 친구의 돈을 훔친다. 지연은 허욱과의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지만, 그런 그녀를 두고 허욱은 “난 바보다...”고 중얼거릴 뿐이다. 1960년대 말 서울의 스산한 풍경 속에서 신성일의 무기력한 표정은 청춘의 불안과 좌절, 시대의 우울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배우 한 사람의 얼굴을 넘어 청춘의 자화상이자 한 시대의 민낯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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