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들 “휴가 갈 권리 인정해달라”

입력
2019.08.08 04:4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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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차보장 의무 없는 택배사는 불응 

 “제도적 보완 필요” 목소리 커져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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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A택배회사 대리점에서 택배 배달을 하는 김모(50)씨의 소원은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 가기’다. 하루 12,13시간씩 주 6일간 택배 배달을 하다 보니 3년째 휴가를 가지 못했다. 김씨는 “오전7시에 출근해 택배를 분류하고 배송하고 나면 늘상 오후7시를 넘겨야 퇴근한다”며 “만약 VIP고객사(홈쇼핑 등) 물품이나 신선식품을 제때 배송하지 못해 본사에 고객 불만이 접수되면 내가 페널티(벌금)을 물어야 하는 처지인데, 배달할 물량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휴가를 갈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고민 끝에 김씨는 동료 130여명과 함께 오는 16,17일을 무급휴가일로 인정하고 대체배송 방안을 마련해달라는 내용이 담긴 휴가신청서를 7일 택배회사에 제출했다.

최근 민주노총 산하 전국택배노조와 택배연대노조가 택배기사의 휴식 보장을 위해 오는 16,17일을 ‘택배 없는 날’로 지정하자는 캠페인을 시작하는 등 택배기사 사이에서 ‘휴가 갈 권리’를 인정해달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택배기사는 택배회사 대리점과 업무위탁계약을 맺은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노동자)여서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 연차유급휴가 보장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만큼 이 문제를 해소할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생활밀착형 서비스인 택배산업은 해마다 성장하고 있지만, 택배기사의 노동시간은 살인적이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2017년 서울지역 택배기사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결과를 보면 이들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75시간, 연간 노동시간은 3,848시간에 달했다. 5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 1인당 연간노동시간(1,986시간ㆍ2018년 기준)보다 1,862시간이나 많다. 특히 ‘공휴일과 일요일을 제외하면 쉬지 않는다’는 응답이 90%를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루 평균 작업량은 평균 253개(배송 187개, 집화 66개)로 통상 택배 하나당 2.2분에 배송해야 하는 등 근무 강도도 높았다.

박구원 기자
박구원 기자

택배기사는 특고노동자여서 자율적으로 휴일을 정하면 쉴 수 있어, 휴일을 쓰는데 법적 제약은 없다. 하지만 업무구조상 이는 쉽지 않다는 게 택배기사들의 주장이다. 김태완 택배연대노조 위원장은 “배송물량이 쉼 없이 쏟아지기 때문에 택배기사가 직접 다른 배송차량(용차)을 수배해 배송수수료의 2배에 해당하는 비용을 지급해야 하는 등의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휴가를 가기 어렵다”며 “여름휴가가 몰리는 8월은 배송 물량이 적기 때문에 택배사들이 결단해 16,17일 만이라도 물량을 줄여주면 택배기사들도 휴가를 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행법상 택배사가 택배기사들의 연차휴가를 보장할 의무가 없어 각 택배사들은 택배노조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택배기사들의 휴식 없는 노동이 구조적 문제인 만큼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은 “2014년 KGB택배가 노사 간 사전 협의를 거쳐 물량을 조절해 휴가를 준 사례가 있다”며 “폭염기간에 실외근무를 할 수밖에 없는 점 등 택배기사들의 건강권 측면에서라도 택배사들은 이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도 보완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지난 2일 택배종사자들의 처우개선 등의 내용을 담은 ‘생활물류서비스법안’이 당정 협의로 발의됐는데, 법안 논의 과정에서 이들의 휴식권 보장을 위한 근무시간 제한, 휴가일 부여 등이 고려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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