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다산독본] 생각지 않게 마음 맞는 벗 사귀었건만… 형님 걱정에 눈물 쏟다

입력
2019.08.15 04:40
24면

 

 <75> 보리자 황인태와 ‘황씨체화집’ 

다산이 올라간 강진군의 진산인 우이봉 정상에서 우이도 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정민 교수 제공
다산이 올라간 강진군의 진산인 우이봉 정상에서 우이도 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정민 교수 제공

다산은 강진에 내려온 지 11개월 만인 1802년 10월에 제자를 받아 서당을 열었다. 조정에서는 다산 형제를 잡아 올려 문초해야 한다는 상소가 하루가 멀다고 올라갔다. 이 와중에도 다산은 묵묵히 작업에 몰두해서 윤 2월 말에 ’단궁잠오(檀弓箴誤)’ 6권을 마무리 지었다.

3월 초에 소흑산도로 불리는 우이도(牛耳島)에 귀양 가 있던 둘째 형님 정약전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서 정약전은 “고기를 못 먹은 지가 이미 한 해 남짓이라 몸이 축나 비쩍 말라 버틸 수가 없다”고 썼다. 입이 짧았던 그는 참기름조차 없어서 비위가 상하는 비린 음식은 입에도 못 대고 있었다. 다산은 3,4월에도 작업을 계속해서 ‘상례사전’ 중 ‘조전고(弔奠考)’의 정리를 끝냈다. 그렇게라도 무언가에 미친 듯이 몰두해야만 다른 생각들을 지울 수가 있었다.

강진 현감 이안묵은 포악한 정사와 가혹한 수탈로, 이를 견디다 못한 백성이 제 양근을 잘라 항의하는 사태까지 빚었다. 다산의 시 ‘애절양(哀絶陽)’이 바로 그 참상을 고발한 작품이다. 1803년 봄에 지었다. 제자 황상도 같은 제목의 시를 자신의 문집에 남겼다. 이 해 여름에 지은 ‘황칠(黃漆)’ 같은 작품은 황칠나무의 수액이 공물로 지정되어 아전의 수탈 대상이 되자, 강진 백성들이 밤마다 도끼를 들고 나가 황칠나무를 찍었다는 내용을 담았다.

주막집이 답답해 숨이 막히면 불쑥 인근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둘러봐도 마음을 나눌 벗 하나가 없었다. 이 시기에 쓴 시 중에 ‘보리자에게 주다(贈甫里子)’란 시가 있다. 보리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시 속에 “마음 맞는 벗이 남쪽 바닷가에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不謂契心友 부위계심우, 乃在南海濱 내재남해빈.)”고 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강진 사람으로 당시 다산과 교유했던 인물인 듯하다.

필자는 여러 해 전 황상의 방계 후손인 황수홍 선생 집에서 ‘황씨체화집(黃氏棣華集)’이란 시집을 구해본 일이 있다. 황상의 당숙인 대은당(大隱堂) 황진룡(黃震龍)과 함재(頷齋) 황승룡(黃升龍), 그리고 석수(石叟) 황태룡(黃泰龍ㆍ1745-1821) 3형제의 시를 한 데 묶은 시집이다. 황승룡은 족보명이 인승(仁升)으로 사의재 제자 황지초의 부친이고, 황태룡은 족보명이 인태(仁泰)였다.

세 사람 중 황태룡, 즉 황인태가 바로 보리자로 추정된다. 그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ㆍ1705~1777)의 제자였다. 이광사의 자가 도보(道甫)다. 이광사가 신지도에 귀양 와 있을 때 황인태는 그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했다. 원교의 필법을 이어받아 인근에서 글씨로 이름이 높았고, 시에도 능했다. 호를 취몽재(醉夢齋)라 썼다. 다산이 그를 위해 지어준 ‘취몽재기(醉夢齋記)’가 ‘다산시문집’에 실려 있다.

‘취몽재기’에서 다산은 그에 대해 “황군(黃君) 아무개는 젊어서부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이 있었다. 비록 세속에 절어 성취한 바가 없으나, 또한 초연히 스스로 몸을 빼서 해맑게 자신을 깨끗이 지켰다. 모습을 보면 순수하여 찌꺼기가 없고, 말을 들어보면 과묵하여 번드르르하지 않다. 세상에서 파리처럼 일을 꾀하고 돼지처럼 씩씩대는 자에게 견준다면 분명하게 깨어있는 깨달은 사람이라 하겠다”고 적었다. 또 ‘탐진농가 발문((跋耽津農歌)’에서도 1804년 4월에 이광사 필법으로 그에게 두 수의 시를 쓰게 한 내용이 있다.

다산이 ‘보리자에게 주다’에서 “진실한 보리자는, 충신(忠信)의 사람이라. 여러 날 밤 터놓고 얘기 나누니, 담박하여 그 순박함 드러났다네. 악착같은 자들 얘기 하다가 보면, 미워함이 입술 위로 드러난다네. (恂恂甫里子 순순보리자, 果哉忠信人 과재충신인. 晤言屢永夕 오언루영석, 淡泊著其淳 담박저기순. 譚彼齷齪者 담피악착자, 憤嫉形牙脣 분질형아순)”라고 황인태의 사람됨을 말한 것과도 일치한다.

황인태는 사의재에서 멀지 않은 오늘날 군동면(郡東面) 석교리(石橋里)에 살았다. 두 사람이 왕래하며 교유한 자취는 황인태의 시집 중 여러 편 시 속에 남아 있다.

 ◇9월 9일 보은산 우이봉에 올라 

황인태의 시 가운데 ‘균암이 지은 9일 등고의 시에 차운하여(次筠菴九日登高韻 차균암구일등고운)’란 작품이 있다. 이 시는 ‘다산시문집’에서 ‘보리자에게 주다’ 바로 다음에 실린, ‘9일에 보은산 정상에 올라 우이도를 바라보며(九日登寶恩山絶頂 구일등보은산절정, 望牛耳島 망우이도.)’와 ‘또 5언시를 지어 승려에게 보여주다(又爲五言示僧 우위오언시승)’ 두 작품 중 뒤쪽 작품을 차운한 것이다. 황인태 시의 앞 부분은 “이 고장 멀고 고약하기로 이름이 나서, 예로부터 귀양객이 유독 많았지. 손님 있어 벼슬이 대부이신데, 난초를 찬 굴원이 아니겠는가? 하늘가서 9월 9일 만나고 보니, 수심 겨워 마음이 배나 꺾인다.(此州名遠惡 차주명원악, 自古多羈旅 자고다기려. 有客官大夫 유객관대부, 蘭佩豈非楚 란패기비초. 天涯屬重九 천애속중구, 愁思倍嶊沮 수사배참저.)”라 했다.

이 시를 통해 다산이 이미 1803년 당시에 균암(筠菴)이란 호를 썼음이 확인된다. 당시 다산은 탁옹(籜翁)이란 호도 함께 썼다. 앞선 글에서 필자는 다산의 ‘균암만필’이 1806년 여름 제자 이정의 집으로 옮겨간 이후에 쓴 당호로 보았다. 이 시가 공개됨으로써 균암이란 호를 사의재 시절에 이미 쓰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므로 수정한다. 사의재 주변에 대나무가 많아서 그런 호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탁옹의 ‘탁(籜)’자도 대나무 껍질이란 뜻이다.

다산은 1803년 9월 9일, 형제들이 높은 산에 올라가 산수유 가지를 머리에 꽂고 술잔을 나누는 가절(佳節)을 만나, 형님 생각이 왈칵 나서 강진 고을의 진산(鎭山)인 보은산에 올랐다. ‘9일에 보은산 정상에 올라 우이도를 바라보며(九日登寶恩山絶頂, 望牛耳島.)’의 서문에는 보은산 정상에서 형님이 계신 우이도(牛耳島) 쪽을 바라보는데, 따라온 승려 하나가 보은산도 일명 우이산(牛耳山)이라 하고 정상에 뾰족 솟은 두 봉우리를 형제봉이라고 한다고 일러준 사연을 설명했다. 우이도는 지금 신안군에 속한 섬으로, 예전에는 이곳을 소흑산도로 불렀다.

 ◇현산인가 자산인가? 

연세대 도서관에 필사본 ‘여유당집(與猶堂集)’ 1책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에는 놀랍게도 그간 한 수도 남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손암 정약전의 시가 32제 40수나 실려 있다. 여기 실린 다산시도 문집 것과 상당히 차이 난다. 연대본 ‘여유당집’은 다산이 흑산도로 보냈던 초고를 베껴 정약전의 시문과 한데 묶었다. 다산의 ‘9일’ 시도 서문이 훨씬 자세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자료여서 전문을 소개한다.

9월 9일 꿈에 둘째 형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9일 날 내가 장차 우이봉(牛耳峯: 소흑산도이다) 꼭대기에 올라가서 강진 쪽을 바라볼 테니, 자네도 높은 데 올라가서 바라보아 정신으로라도 서로 만나세나.” 마침내 아침밥을 재촉해 먹고서 보은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산은 강진현의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승려 근은(謹恩)이 따라왔다. 산 위에 올라 술을 마시고 서편을 바라보았다. 산과 바다가 서로 겹쳐져 안개와 구름 사이에서 가물거리고 나주의 여러 섬들이 또렷이 앞에 펼쳐졌다. 다만 어떤 것이 우이도인지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근은이 말했다. “이 산은 일명 우이라고 하고(‘강진현지’에는 “진산(鎭山)이 누운 소의 형상이어서, 서북 쪽 한 봉우리가 소귀가 된다”고 했다.) 꼭대기의 두 봉우리는 형제봉이라고 합니다.” 내가 말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는 곳이 모두 우이의 꼭대기이고, 봉우리의 이름도 형제봉이라 하니 또한 우연이 아니겠는가?” 인생이 이리저리 떠돌아도 모두 미리 정해진 것이 있는 듯한지라, 이 때문에 서글퍼져서 즐겁지가 않았다. 돌아와서 시를 지어 형님에게 부쳤다.

시에서 다산은 200리 떨어진 두 곳에 똑 같은 우이봉이 있는 우연에 감탄하고, 형님 계신 곳을 이렇게 바라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적었다. 비록 구름 안개에 가려 분간할 수는 없어도 눈이 빠져라 바라보노라니 눈물도 말라버리고 천지조차 캄캄해지더라고 썼다.

시의 제 4구에 이런 주석이 달려있다. “흑산(黑山)이란 이름은 어둡고 캄캄해 무섭다. 내가 차마 이렇게 부르지 못해 매번 편지를 보낼 때마다 고쳐서 현산(玆山)이라 하였다. ‘현(玆)’이란 검다는 뜻이다.(黑山之名 흑산지명, 幽黑可怖 유흑가포. 余不忍呼之 여부인호지, 每書札改之爲玆山 매서찰개지위자산, 玆者黑也 자자흑야.)” 이 글자를 ‘자’로 읽으면 지시대명사 ‘이’의 뜻이고, ‘현’으로 읽어야 검다는 의미가 된다. 흑산의 암흑스런 느낌이 싫어서 같은 의미를 취해 읽었으니, ‘자산’이 아닌 ‘현산’으로 읽는 것이 맞다. 정약전의 책 이름도 ‘현산어보’라야지, ‘자산어보’일 수 없다. 다산이나 제자 이강회가 다른 글에서 흑산도를 ‘현주(玄洲)’라고 적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자산은 그냥 ‘이 산’이고, ‘현산’이라야 ‘흑산’의 뜻이 되기 때문이다.

 ◇너는 내 맘 모르리 

앞서 황인태가 차운했던 두 번째 시, ‘또 5언시를 지어 승려에게 보이다(又爲五言示僧 우위오언시승)’의 제목이 연대본 ‘여유당집’에는 ‘승려 근은이 내 시를 굳이 구하기에 다시 시를 지어서 주었다.(恩上人苦求余詩 은상인고구여시, 復爲詩以予之 복위시이여지.)’로 되어 있다. 길잡이로 따라온 고성사 승려 근은을 위해 지어준 시임을 알 수 있다.

가을이면 저절로 서글퍼짐은(秋日自然悲 추일자연비)

나그네 신세 한스러워서가 아닐세.(非因恨羇旅 비인한기려)

옷깃 걷고 높은 뫼를 올라온 것은 (攬衣陟崇岡 남의척숭강)

시린 마음 풀어볼까 해서였었지. (聊欲解酸楚 요욕해산초)

멧부리 어지러이 솟아 춤추며 (山巒紛舞躍 산만분무약)

바다에 가 닿고도 기세가 높다. (到海氣未沮 도해기미저)

꽃은 비록 국화가 아닐지라도 (雜花雖非菊 잡화수비국)

내 술잔에 띄우기엔 충분하다네. (自足泛吾醑 자족범오서)

거나하게 석 잔 술을 들이켜고는 (陶然寫三杯 도연사삼배)

눈 빠져라 섬이란 섬 모두 보았지. (縱目窮島嶼 종목궁도서)

취한 뒤엔 눈물을 줄줄 흘리니 (旣醉淚淫淫 기취루음음)

이 맘 네게 말하긴 참말 어렵네. (玆懷難語汝 자회난어여)

다산은 석 잔 술을 연거푸 들이켜고, 자꾸만 안개 속에 숨는 섬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젊은 승려 근은의 시선 또한 다산의 눈길이 향하는 우이도 쪽을 아슴아슴 말없이 쫓고 있었다.

이 시를 통해 지난 회에서 다산이 황상과 함께 시를 전공하면 시사(詩社)가 원만하겠다던 승려 제자 근은의 존재가 처음으로 드러난다. 다산은 1803년 9월 9일, 보은산 등고(登高) 길에 고성사 승려 근은을 길잡이로 세워 오르면서 그와 첫 번째 인연을 맺었다. 다산은 학문에 몰두하고 제자를 받아 사의재 서당을 열었지만, 조정 소식과 집안 걱정, 형님 근심에 속이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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