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C] 약속의 무게

입력
2019.07.25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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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 1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김상조 정책실장이 최저임금 공약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 내용을 발표한 뒤 물을 마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1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김상조 정책실장이 최저임금 공약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 내용을 발표한 뒤 물을 마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초등학생인 아이의 친구가 2학기 전교 부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아이는 ‘선거 캠프’ 일원으로 친구를 도왔지만, 아쉽게도 다른 후보가 당선됐다. 선거 결과가 공개된 날 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선된 후보는 공약을 지키지 못할 게 분명해 보이는데, 공약을 못 지키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봤다.

당선된 후보가 내세운 주요 공약은 ‘교내에 여러 가지 공용 공을 비치해두고 원하는 학생들이 언제든 빌려 쓸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선거에서 탈락한 아이의 친구도 공약으로 검토했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아이와 친구는 공약을 발표하기 전 교무실로 찾아가 담당 교사에게 공용 공 비치와 대여가 실현 가능한지를 물어봤다. 교사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어렵겠다고 답했다.

교사의 답변을 들은 아이와 친구는 고민에 빠졌다. 공 대여는 분명 스포츠를 좋아하는 많은 친구들의 표를 단숨에 확보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공약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난감해 한다는 걸 알게 된 마당에,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운 공약을 내세우는 건 어쩌면 거짓말을 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아이와 친구는 아깝지만 공 대여 공약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선거 유세 기간에 공개된 상대 후보의 공약에 바로 그 공 대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상대의 공약 내용을 자세히 살펴봤지만, 학교에 실현 가능성을 확인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했다.

아이는 공 대여 공약을 일단 발표하고 실현 여부는 당선된 뒤 고민해도 되는 거였는지, 만약 담당 교사가 한쪽 캠프에는 실현이 어렵다 해놓고 당선자의 공약이니 재검토한다면 불공정한 게 아닌지, 질문을 쏟아냈다. 공 대여 공약을 지지한 학생들은 당연히 실현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을 테고, 만약 공 대여가 실현되지 못하면 당선자는 약속을 어기는 게 될 거라며 혼란스러워 했다.

공약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내놓는 엄중한 약속이다. 유권자들은 그 약속을 믿고 표심을 정한다. 이제 10대 초반인 초등학생들도 학교 선거를 통해 공약의 무게를 배워가고 있다. 아이의 고민을 듣는 동안 어느새 많이 컸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문재인 정부의 고민이 겹쳐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을 실현시키겠다던 공약을 달성할 수 없게 됐다고 사과했다. 지난해 7월에 이은 두 번째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건설된 보(洑)의 수문을 상시 개방하고, 평가 후 선별적으로 철거하는 방안도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내년 총선을 앞두고 보 처리가 정치 논리에 휘말리면서 최종 처리 방안을 결정하기 위해 이달 초 예정됐던 국가물관리위원회 출범은 아직 소식이 없다.

박근혜 정부가 만든 사용후핵연료(원자력발전소에서 쓰고 남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정책을 재검토하겠다는 공약을 이행할 첫 단계인 사용후핵연료 정책 재검토위원회도 지난 1월 첫 발을 뗄 예정이었으나 넉 달 늦게 지각 출범했다. 더구나 첫날부터 위원 구성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오며 지난 정부 때 갈등이 재현됐다. 자율형 사립학교 폐지 공약도 일부 학부모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며 교육계를 둘로 갈라놓고 있다.

대통령 임기 중반인데 주요 공약들이 줄줄이 답보 상태에 놓였다. 하나 같이 격렬한 논란과 첨예한 갈등을 빚을 게 자명한 사안들이다. 공약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민감한 사안을 공약으로 내세우기 전 찬반 양쪽의 의견을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수렴했는지, 실현 계획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세웠는지가 중요하다. 더 잘 준비된 공약이었다면 사회 갈등이 덜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크다. 공약으로 표심을 얻는 것보다 공약을 발표한 대로 지키는 게 더 어렵다는 사실은 초등학생들도 안다. 그래서 공약은 신중해야 하고, 세심해야 하며, 성숙돼야 한다. 표심은 공약을 오랫동안 기억한다.

임소형 산업부 차장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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