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우치다 변호사 “강제동원은 인권 문제… 日정부는 독일 선례 배워야”

입력
2019.07.25 04:40
수정
2019.07.25 05:22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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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한일 비상구는 없나] <중> 화해, 불가능하지 않다

냉전시대 국제법서 벗어나 전향적 자세로 화해 나서야

1+1이든 2+1이든 해법은 기금 설립 방법 밖에는 없어

중국 강제동원 피해자와 일본 기업과의 화해 성립에 힘써 온 우치다 마사토시 변호사가 20일 도쿄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일 징용문제 갈등과 관련해 기금 설립을 통한 방안을 강조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중국 강제동원 피해자와 일본 기업과의 화해 성립에 힘써 온 우치다 마사토시 변호사가 20일 도쿄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일 징용문제 갈등과 관련해 기금 설립을 통한 방안을 강조했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일본의 변호사 우치다 마사토시(内田雅敏)씨는 오래도록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와 일본 기업의 화해를 주선해온 인물이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에서 비롯된 한일 갈등의 골이 나날이 깊어가고,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 양국 관계 개선의 해법을 우치다 변호사라면 어느 정도 갖고 있지 않을까. 우치다 변호사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강제동원 문제 해결도 기금 설립을 통한 방법밖에 없다”고 단언하며 한일 양국이 지향해야 할 접점을 제시했다. 그는 그러면서 “일본 정부가 독일의 선례를 배워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또 “일본 정부가 중국은 교전국이었고 한국은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서로 다른 사안이라고 하지만, 강제동원은 인권 문제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며 “중국보다 가치관을 더 많이 공유하고 있는 한국과의 화해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출 규제 갈등으로 지금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한일 양국이지만 ‘인권’이라는 실마리를 쥐고 오래도록 공유해온 가치관을 기반으로 자세를 바꾼다면 화해의 지점도 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와 일본 기업 간 대표적인 화해 사례로 꼽히는 2000년 하나오카(花岡)화해ㆍ2009년 니시마쓰(西松)건설 화해ㆍ2016년 미쓰비시(三菱)머티리얼 화해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했던 그를 20일 일본 도쿄(東京)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한일 대립의 핵심은 지난해 대법원 강제동원 배상 판결이다.

“판결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식민치하 개인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논의되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포기된 것은 외교 보호권이지 개인 청구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이를 국민에 설명하지 않은 채 ‘양국 합의에 반하는 판결’이라는 주장만 펼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일본도 개인 청구권은 인정하고 있지 않나.

“지난해 11월 고노 다로(河野太郎) 외무장관이 국회에서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도 2007년 중국인 강제동원 피해자가 니시마쓰건설에 배상을 청구한 사건에서 1972년 중일 공동성명에서 포기된 청구권과 관련해 부언(附言)에서 ‘피해자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라고 인정했다. 이는 2년 뒤 2009년 니시마쓰건설 화해와 2016년 미쓰비시머티리얼 화해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화해 성립 당시 일본 정부의 입장은 무엇이었나.

“니시마쓰건설, 미쓰비시머티리얼 화해의 경우 일본 정부는 민간 문제라며 화해 성립에 관여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한국의 경우도 민간 사이의 문제라는 지점에서 화해가 가능하다. 일본 사회는 화해가 성립된 중국보다 한국과 가치관을 더 많이 공유하고 있지 않나. 그러나 이번(한국의 경우)에는 일본 정부가 적극 개입하면서 기업들이 화해에 나서기 어려워졌다.”

그는 2009년 니시마쓰건설 화해 땐 산케이(産經)신문만, 2016년 미쓰비시머티리얼 화해 땐 산케이와 요미우리(讀賣)신문만 우려를 표했을 뿐 다수 일본 언론이 긍정 평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해 대법원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대해선 대부분 일본 언론이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고노 장관은 19일 “한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뒤엎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후 처리를 위해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언급한 것이다. 이는 냉전 하에서 개인 청구권을 봉인한 조약이다. 인권 존중이 중시되는 현 시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도 이미 해결됐다고만 주장하지 말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새롭게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을 수용해야 한다. 지금으로선 ‘중국은 교전국’이고 ‘한국은 식민지였다’는 게 일본 측 인식이다. 1951년 당시 국제법상 식민 지배는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인데, 열강들이 멋대로 만든 국제법을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식민지배의 불법성 여부에 대한 이견인데,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역사문제 해결을 위해선 3가지가 필요하다. 가해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사죄의 징표로서 화해(배상)금을 지불하는 것,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미래 세대에게 역사를 알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 역사를 제대로 마주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일 간에는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

“독일의 화해 사례를 배워야 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가 모든 게 해결됐다고 주장한다면 진정한 한일 간 화해는 이뤄질 수 없게 된다. 시간이 걸리면 걸릴수록 미래 세대들이 제대로 된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화해는 그만큼 어려워진다.”

독일 정부와 독일 기업들은 2차 대전 당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위한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을 설립해 보상한 사례가 있다. 그는 “일본 정부가 기금에 참여할 경우 재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이는 정부의 무기 구매를 줄이면 가능하다”며 “한일 간 화해는 동북아시아 안전보장의 문제라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아베 정부의 역사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렇다. 피해의 진실을 조사해 가리는 것은 비교적 쉬운 반면, 가해의 진실을 가리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독일의 경우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프랑스의 관용에 감사를 표했다. 이를 위해 독일은 프랑스에 조심하면서도 절도를 보였다. 강제동원에 대한 한국 측의 관용을 바라기 위해선 먼저 일본 정부가 언행을 조심하면서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고노 장관처럼 한국의 1+1안 제안에 대해 ‘매우 무례하다’는 식의 발언을 해선 안 된다.”

-한국 정부는 ‘1+1안’이 최종안이 아니란 입장이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결국 한국 정부도 참여하는 ‘2+1안’을 대안으로 거론하고 있다.

“1+1이든 2+1이든 기금을 통한 방안밖에 없다. 다만 한국과 중국은 강제동원에 따른 인권 침해라는 점에서 본질은 같지만 규모가 전혀 다르다. 중국은 1944년 8월부터 45년 5월까지 3만8,935명이 동원됐고 사망자는 6,830명이었다. 한국은 동원 기간이 길고 노무현 정부의 조사에선 약 20만명, 이후 70~8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때문에 기금 방식으로 해결할 경우 우려되는 것은 금액이다. 대법원 판결을 기준(1인당 1억원)으로 하기엔 무리가 있는데, 기금 참가자들이 머리를 맞대 해결해야 한다. 최선은 아니어도 차선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샌프란시스코 조약 재고는 한일 청구권 협정의 재고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2002년 북한과 일본 간 평양선언은 식민 지배를 사과한 무라야마(村山) 담화를 따르고 있다. 북일 국교정상화는 평양선언을 기초해 진행될 텐데, 그 과정에서 식민 지배 배상 문제는 당연히 고려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식민 지배를 논하지 않은 한일 청구권 협정도 재고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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