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다니엘 린데만이 “꼭, 제대로 실패하세요” 말하는 이유

입력
2019.07.26 09:00
수정
2019.07.29 15:55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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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37>다니엘 야콥 린데만

‘독다니엘’로 얼굴 알려… ‘나의 몫’ 고민하는 방송인

“한국은 정답 사회… 하지만 사는 데엔 정답 없다”

독일에서 온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 그가 마이크 앞에서 하는 고민은 '나의 몫은 무엇인가'이다. 그를 18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홍인기 기자
독일에서 온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 그가 마이크 앞에서 하는 고민은 '나의 몫은 무엇인가'이다. 그를 18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홍인기 기자

그에게도 고비가 있었을까. 실은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던진 질문이었다. 나이는 이제 서른 셋인데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큰 인기를 얻어 꾸준히 방송을 잇고 있는 잘나가는 독일 청년. 한국에서 석사 학위까지 받을 정도로 명석한 그에게 무슨 인생의 비바람이 있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묻자마자 하나도 아니고 세 번이나 있었노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첫 고비는 스무 살에 닥쳤다. 군복무를 대체해 스페인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때였다. 성당의 신부는 회사로 치면 ‘직장 내 괴롭힘’의 극치를 달리는 상사였다. 다른 성적 지향은 아랑곳하지 않고 애정 고백을 했다가 거절 당하자 극심한 노동과 폭력적인 행동으로 앙갚음했다. 독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 탓에 그 시절 그의 몸무게는 무려 16㎏이 빠졌다.

‘고학력 무직자’의 설움도 겪었다. 한국으로 유학을 와 석사 학위까지 땄는데도 그를 받아 주는 직장은 없었다. 학원 강사 자리마저 퇴짜를 맞았다.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비자 기한이 만료돼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독일에서도 한국의 석사 학위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기대치를 낮춰 그가 구한 일자리는 대형마트의 파트타임 노동이었다.

그는 “두어 달 전에도 힘든 일이 있었지만 아직 다른 누구에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게 세 번째 고비였다.

지금의 다니엘 린데만을 만든 건 이런 인생의 고난일까. 내 생각은 아니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가 비결이었다. “그런 고약한 경험을 해 보니 어떤 이상한 사람을 만나도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할 수 있고, 일이 좀 잘 되지 않아도 ‘좀 더 버텨보지 뭐’ 하게 됐죠. 무슨 일이 생겨도 감당할 자신 같은 게 생겼어요.”

실패의 가치를 아는 그는 그래서 “꼭, 제대로 실패해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니 성공한 인생에는 시련이 있기 마련이지만, 시련이 있었다고 모두 다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일 테다.

예능에서 시사로, 방송의 지평을 넓혀가는 방송인이자 피아노 연주자이면서 합기도 사범이기도 한 ‘실패 전도사’ 다니엘을 만났다.

◇엄마의 마법 같은 주문 “다니, 잘하고 있어”

그는 11년 전인 2008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처음 발을 디뎠다. 이제는 이태원이나 홍대 거리에서 많은 이들이 알아보는 유명인이 됐다. 홍인기 기자
그는 11년 전인 2008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처음 발을 디뎠다. 이제는 이태원이나 홍대 거리에서 많은 이들이 알아보는 유명인이 됐다. 홍인기 기자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지요.

“시간이나 장소에 따라 좀 달라요. 주말 밤 이태원이나 홍대 앞에 가면 많이 알아보지만, 주중 지하철 같은 데선 잘 몰라요.”

-처음엔 좀 얼떨떨했을 것 같아요.

“알아봐주시니 감사했죠. 5년 전 처음 인사를 받았을 때가 아직도 기억 나요. 그때는 회사 다닐 때라서 출근하는 길이었는데 지하철에서 어느 여자분이 악수를 하자면서 방송 잘 보고 있다고 해서 신기했어요.”

-아버지가 이스라엘 군인이었다고 들었어요.

“엄마가 미혼모예요. 아버지가 잠시 독일에 들어와 있을 때 엄마가 저를 가졌죠. 전쟁이 일어나서 아버지는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엄마가 혼자 저를 키우셨어요. 어릴 때는 사정을 전혀 모르다가 좀 컸을 때 엄마가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면서 얘기를 해주셨죠. 엄마는 아버지를 나쁘게 얘기한 적이 없어요. 6년 전쯤 아버지와 연락이 닿아서 영상 통화를 두 번 정도 했죠. 어릴 때는 커서 아버지를 찾으러 가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그 분도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요.”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요?

“엄마랑 친구처럼 지냈어요. 둘 다 밝은 성격이어서요. 그리고 어머니는, 어머니죠(미소). 친구이기도 하고 선생님이기도 하고요. 때로는 저한테 엄마가 배우기도 해요. 엄마는 열려있는 사람이거든요. 나를 어떤 쪽으로든 강요하지 않았어요. 엄마는 늘 ‘다니(애칭), 지금 잘 하고 있으니까 네가 알아서 하면 돼’ 정도의 조언만 했죠.”

-항상 믿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네요.

“맞아요. 군대 대신 해외에서 봉사 활동으로 대체(복무)하겠다고 했을 때도, 한국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도 엄마는 지지해줬죠. 할아버지, 할머니, 친구들은 다 반대할 때도 엄마는 ‘진짜 하고 싶은 게 그거라면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엄마의 기대를 나한테 심어주려 하지 않았죠. 정말 고마워요.”

-어머니가 거꾸로 배우기도 했다는 것도 인상적이에요. 어른이 되면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기가 쉽지 않게 되는데 어머니는 아니었네요.

“학교에서 배운 것 중에 재미있는 게 있으면 엄마에게 말하곤 했는데, 종종 엄마는 ‘너는 나보다 더 훨씬 더 많이 배우고 생각하는구나’라고 했죠. 수학문제를 풀다가 엄마에게 물어보기도 했는데 엄마도 모를 때는 ‘그건 엄마도 모르겠네. 하지만 네가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했어요. 그러면 더 자신감이 생겨서 열심히 공부를 했죠.”

-아들은 자라면 어머니와 다소 소원해지기도 한다던데, 다니엘씨는 아닌 것 같아요.

“만약 부모가 모두 계셨으면 좀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엄마와 저 둘만 있으니까 서로 고민도 나누고 의지하며 살았어요. 돌이켜보면 학교에서 뭘 배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엄마와 할머니, 할아버지 세 분한테 뭘 배웠는지는 다 기억이 나요. 그러니 어린 시기에 교육은 학교가 아니라 집에서 이뤄진다는 말이 맞아요. 학교는 교육이 아닌 지식 전달의 역할을 하는 거죠.”

뜬금없이 이게 궁금했다. 그는 단박에 대답했다.

-어머니는 행복한가요.

“네! 정말 잘 웃고 사교적인 분이죠. 그런 면을 제가 많이 닮았어요.”

◇태권도로 알게 된 한국

10년 전의 다니엘.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머물던 2009년 서울 경희대에서 열린 제12회 세계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대상을 탔을 때다. 연합뉴스
10년 전의 다니엘.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머물던 2009년 서울 경희대에서 열린 제12회 세계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대상을 탔을 때다. 연합뉴스

-어릴 때 꿈은 뭐였나요.

“매일 바뀌었죠. 하하. 농촌에 살았거든요. 주변에 잔디와 숲이 있었죠. 말 농장도요. 학교에서 돌아와서 숙제를 마치면 친구들과 뛰어 노니까 무슨 놀이를 하느냐에 따라서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매일 바뀌더라고요. 좀 커서 액션에 관심이 생길 땐 스턴트맨, 경찰, 스파이, 소방관, 그러다가 뉴스 진행하는 아나운서, 축구선수도 되고 싶었죠. 엄마가 그래서 매일 놀렸어요.”

-그러다가 대학에선 동양학을 전공했죠.

“어릴 때 성룡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래서 무술도 배우고 싶어했죠. 그런데 동네에 태권도 초보자 교실이 열린 거예요. 그래서 열세 살 때부터 태권도를 배웠어요. 처음에는 일본 무술인 줄 알았는데 사범님이 한국 무술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까지는 한국이란 나라 이름을 들어보긴 했지만 잘은 몰랐으니까 막 찾아봤죠. 한국 사람들은 다 태권도를 잘할 것 같았어요. 저도 한국을 알아야 태권도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나중에 대학 갈 무렵에 한국에 더욱 관심이 생겼죠. 마침 집에서 가까운 본대학에 동양학과가 있어서 들어갔고 한국을 전공으로 선택했어요. 아직도 한국어 수업 첫 시간이 기억나요. 하하.”

그가 재미난 일이 생각났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한국어 회화 수업이었는데, 저는 그때 너무 열정이 넘쳐서 빨리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고 싶었어요. 학생이 50명이었는데 원어민 선생님이 ‘안녕하세요’를 적은 뒤에 한 사람씩 발음을 해보도록 했어요. 그런데 저 혼자 틀린 거예요. 시옷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선생님이 ‘이게 아닌데’ 하면서 계속 시켰죠. 그때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하하. 열정은 내가 제일 많았는데 말이죠. 하지만 나중에는 수업이 너무 쉬워져서 따로 더 공부를 할 정도가 됐죠.”

-그러다가 교환 학생으로 한국 대학에 왔죠.

“3학년 때인 2008년 고려대 어학당으로 왔어요. 2009년 독일로 돌아가서 4학년을 마친 뒤에 다행히 한국정부초청장학프로그램(KGSP)에 선정돼서 석사 과정(연세대)을 밟으러 다시 들어왔죠. 그 뒤로는 독일에 4개월 정도 머무른 걸 빼면 계속 한국에서 살고 있어요.”

-교환학생 1년을 한 뒤 왜 다시 한국으로 왔나요.

“너무 좋아서요. 하하.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국은 훨씬 현대적인 나라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에 오기 전에 말도 안 되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어요. 한국학 공부도 정말 재미있었죠. 그래서 박사까지 한 뒤에 교수를 하려고 했어요. 그렇다면 한국학은 한국에서 공부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TV 예능 ‘비정상회담’은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요.

“저한테 제작진이 출연을 제안하면서 일단 미팅을 하자는 이메일이 왔어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2014년 다시 한국에 들어와서 5명 밖에 안 되는 소규모 헤드헌팅 업체에서 일을 할 때였죠. ‘비정상회담’이 이미 3회까지 방송이 됐는데, 한 사람이 빠지게 되면서 그 자리를 메울 사람을 찾는 거였어요. 어학당이나 대학원의 누군가가 저를 추천했을 텐데 아직도 누군지 몰라요.”

-왜 출연 결심을 했어요.

“그 전에도 방송 섭외가 몇 번 들어왔어요. 그런데 논문을 쓰느라 바빴다거나 엄마가 한국에 들어와서 함께 시간을 보낼 때라거나 하는 이유들이 있어서 출연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비정상회담’은 이미 나간 방송의 반응을 보니 괜찮았고 취지도 마음에 들었죠. 촬영도 주말에 한다고 하니 한 번 해보자 싶었어요. 그런데 그 방송으로 인생이 180도 바뀌었네요.”

◇방송은 대박 났지만, ‘난 누군가’ 고민

그는 첫 방송을 예능 프로그램으로 시작했지만, 역사 다큐멘터리 같은 인문학뿐 아니라 최근엔 시사프로그램까지 반경을 넓혔다. 6월 말부터 한겨레신문의 인터넷방송인 ‘한겨레 라이브인’ 주말판 진행을 맡고 있다. 홍인기 기자
그는 첫 방송을 예능 프로그램으로 시작했지만, 역사 다큐멘터리 같은 인문학뿐 아니라 최근엔 시사프로그램까지 반경을 넓혔다. 6월 말부터 한겨레신문의 인터넷방송인 ‘한겨레 라이브인’ 주말판 진행을 맡고 있다. 홍인기 기자

-방송에 출연해 보니 어땠나요.

“처음엔 적응이 안됐어요. 휴.”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대학원 다닐 때 성적도 좋았고 조교도 한 데다 외국인 대상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대상도 받았으니 한국어에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전에 대본 리딩을 하면서 인사말조차 여러 번 시켜보더라고요.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죠. 시키는 대로 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이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어요’ 했죠. 그런 뒤에 녹화에 들어가는데 너무 떨리는 거예요. 외국인 패널 열한 명에 연예인 진행자(MC) 세 명까지, 남자 열네 명의 기가 만만치 않거든요. 나는 피아노를 치는 장면으로 등장한 뒤에 MC 중 하나인 (가수) 성시경씨와 인사를 해야 했죠. 그때 성시경씨가 독일에선 인사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는데 제가 원래는 ‘악수를 하면서 이렇게 어깨를 살짝 쳐요’라고 해야 하는데 악수를 박수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성시경씨가 ‘아, 악수한다고요~’라고 고쳐 주고요(한숨). 속으로 ‘등장하는 순간부터 망했구나’ 싶었죠. 그래도 다행스럽게 첫 출연 반응이 좋았어요.”

-회사는 방송 때문에 그만둔 건가요.

“한 4, 5주 지나가니까 정말 하루 종일 전화가 오는 거예요. 그 때는 매니지먼트가 없었으니 제작진이 인터뷰나 광고, 다른 방송 섭외가 들어오면 개인 번호를 알려줬거든요. 그러니 사무실에서 앉아 있으면 한 2분 마다 카톡이며 전화가 오더라고요. 하지만 회사를 다니니 주중에 해야 하는 일은 거절 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어차피 방송 출연료 만으로도 회사 월급의 세 배쯤 되더라고요. 게다가 그 때 규정이 바뀌어서 한국인 직원이 최소한 5명은 있어야 외국인 1명한테 취업비자를 발급했는데 제가 다니던 회사는 기준 미달이었죠. 그래서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뒀어요. 사실 방송을 하면서 돈을 벌어서 박사 과정을 밟으려고 했는데 5년째 이러고 있네요. 하하.”

지금 그는 소속사의 매니지먼트를 받고 있다. ‘비정상회담’의 JTBC가 아예 자회사로 기획사를 만들어 그와 같은 출연진의 비자 문제가 해결된 거다. 예술흥행비자(E-6)를 받으려면 소속사가 있어야 한다.

-공부를 계속 해서 박사 학위를 딸 생각이 있나요.

“강연을 그간 많이 다녔는데, 가면 그 질문이 꼭 나왔어요(미소). 박사를 안하고 있는 이유는 제가 예능뿐 아니라 시사프로그램이나 인문학을 다루는 방송도 하기 때문이죠. 방송을 한번 하려면 준비를 되게 많이 해야 하거든요. 독일과 관련된 얘기를 하려고 해도 미리 알아보고 조사해야 하고요. 그 공부에 대한 반응은 바로 나오죠. 강연을 해도 마찬가지예요. 책상 앞에 앉아서 한 분야를 깊게 파고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현장을 두루 다니면서 넓고 얕게 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 유적지나, 비무장지대(DMZ)에도 직접 가보고요,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러 유럽까지 가기도 하죠. 저에게는 굉장히 보람 있는 공부예요. 자료로 남는다는 것도 큰 강점이고요. 방송에서 예전에 했던 얘기를 다시 해야 할 때는 찾아서 보면 되거든요. 그러면 그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다시 생각이 나죠. 그러니 지금은 박사보다 다른 데서 저의 몫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예능 방송만 하면서 살 수도 있는데, 인문학이나 시사프로그램도 하는 걸 보면 한국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듯해요.

“전공을 살릴 수 있으니까요. 한국에 살면서 보니 자기 전공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고요. 독일은 웬만하면 자기 전공 분야의 일을 하거든요. 음악 전공한 사람이 마케팅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어요. 독일식대로 생각해보면 저는 방송을 하니까 저만이 할 수 있는 몫을 하려고 해요. 저보다 더 말도 잘하고 사람을 웃길 줄 아는 방송인들 많잖아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독일인의 시각을 전하는 일이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돈을 번다면 저는 용납이 안될 것 같아요. 방송이 저의 직업이 됐으니까 저의 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의 몫’이란 말이 인상적이에요.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나요.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직업 없이 방송만 하니까 고민이 많이 됐어요. ‘나의 타이틀은 뭐지, 나의 직업은 뭐지, 나는 그냥 TV에 나오는 사람인가’ 하는. 그저 놀면서 돈 많이 버는 건 용서가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재미는 없을지 모르지만 내가 공부해서 할 수 있는 방송인의 길을 가자고 마음 먹었죠.”

-그런 고민은 언제부터 들었나요.

“처음부터 바로 그랬어요. 그때는 방송을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 몰랐고 길어야 1, 2년 하다가 다른 일을 할 줄 알았죠. 회사를 그만두고 화보 촬영이나 광고로 돈을 벌지만 이걸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었죠. 몇 년 동안 계속 됐어요. (외국인) 출연진도 그때 대부분 자기 직업이 있었잖아요. 나는? 없었죠. 사람들이 저를 보고 ‘쟤는 재미도 없는데 연예인 하려고 하나 보네’ 할 것 같고요. 나 스스로도 자괴감이 들었어요. 피아노 앨범을 낸 이유도 방송 이상의 활동을 하고 싶어서였죠.”

-직업이 어떤 의미라고 생각해서 그랬나요.

“시대가 달라졌지만 제가 어릴 때는 주위 사람들이 모두 평생 직업을 가졌죠. 할아버지는 평생 오르가니스트, 할머니는 우체국에서 일하시다가 결혼한 뒤에는 합창단 지휘자, 엄마는 간호사, 삼촌은 헬기 조종사, 친구들도 비행기 조종사나 라디오 DJ 이렇게 평생 가는 직업이 있었어요. 나는 어떻게 보면 고학력자이지만 그런 직업이 없었죠. 지금은 시대가 달라지기도 했고 방송인으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기 때문에 고민을 좀 덜하고 있죠. 그리고 저한테는 인기나 돈보다도 한국에서 살 수 있는 비자가 계속 나오는 게 더 중요했어요.”

◇세월호 생각하면 아직도 울컥

그는 자신이 방송이나 강연으로 한국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홍인기 기자
그는 자신이 방송이나 강연으로 한국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홍인기 기자

-한국에 살아보니 독일과 비교해서 두드러지는 차이가 뭐던가요.

“한국사회가 독일을 보며 배울 것도 있고, 독일도 한국에서 배울 게 확실히 있어요. 예를 들면, 한국이 더 편한 이유가 사람들이 사교적이고 역동적이죠. 독일에서는 심심했거든요. 또 하나 차이는 한국은 ‘정답 사회’ 같아요. 그걸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개인 생활에 참견도 하고요. 독일에서는 정답이 없고 사람마다 살아가는 게 다를 수 있다는 인식이 좀더 강하죠.”

-한국사회의 문화 중에서 이거는 바꾸고 싶다고 생각한 게 혹시 있나요.

“강연할 때나 방송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말하는 게 세 가지 있어요. 도로에서 구급차 비켜주기, 비판적 사고방식, 한국의 통일 방향이에요. 구급차가 빨리 가도록 협조하는 건 내 인생의 30초를 희생해서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일이죠. 구급차가 거짓으로 사이렌 울리며 다녔다는 보도가 나기도 했지만, 실제로 구급차 안에 위급한 환자가 탔을 수 있으니 일단 비켜줘야 해요. 독일에서는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 가르쳐서 체계화 돼 있어요. 차선에 따라서 비켜주는 방법이 다르죠. 한국도 그런 방식을 도입하면 정착될 거예요.

그 다음 비판적 사고는 독일 교육의 핵심이에요. 교사의 말조차도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다른 의견이 있다면 얘기를 하도록 하죠. 대신 근거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한국은 아직도 주입식 교육을 많이 하죠. 그런데 주입식 교육은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잔재잖아요. 오히려 한국의 전통 교육은 그렇지 않았죠. 조선 시대에 과거시험은 문제 해결 능력을 보는 논술형이었죠.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교육 방식이었어요.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역사 교과서, 독도 문제로 일본을 비판하고 반성을 요구하면서 일본 사람들이 심은 교육을 하면 안되죠.

셋째로 통일 문제는 독일 통일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한국 통일의 방향을 생각해보도록 하는 건데요. ‘독일이 통일 했으니 우리도 무조건 해야지’라고 생각하기 보다 통일에 어떤 여건들이 필요한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예요.”

그가 한국에 산 지 벌써 10년이다. 한국사회에 사는 동안 가장 충격적인 일은 뭐였는지 물었더니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리곤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세월호였죠. 세월호는... 처음 뉴스를 봤을 때도 눈물을 흘렸어요. 그거는…, 정말 말이 안 되는 사건이었죠. 왜 아직도 (희생자들을) 안 구했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2014년 4월 당시 합기도 도장에서 사범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저녁 6시쯤에 관장실에 들어갔더니 관장님이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TV를 보면서 ‘큰일 났다’고 했죠. 나중에 광화문에서 시민들이 (진상 규명) 촛불집회 하는 것도 다 지켜봤어요. 도장에 가려면 광화문을 지나야 했거든요. 왜 학생들한테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사고가 났으면 주변의 해양경찰, 군인, 헬기, 배 모두 투입돼서 구조 작전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독일에서 그런 사고가 났다면 메르켈 총리가 뭐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왜 그에게 전화를 하겠어요. 일단 구조를 하죠. 그러지 않고 300명 넘는 사람들이 어떻게…”

-맞아요.

“당시에 독일어 과외를 할 때였는데 학생이 남자 고등학생이었어요. 열정적인 학생인 데다 저처럼 피아노 연주가 취미라서 재미있게 수업하며 지냈죠. 그런데 그 학생 또래가 희생 당한 일이어서 더 마음이 아팠어요. 지금도 눈이 촉촉해지네요.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좌파냐, 우파냐, 진보냐, 보수냐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건 정치적인 이슈가 아니잖아요? 인간적인 이슈이지.”

그가 좀더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같은 코스로 제주도에 놀러 간 적이 있거든요. 2012년에 엄마가 한국에 놀러 와서 비행기 타고 제주도에 가는 건 낭만이 없으니 배로 가자고 해서 인천에서 출발하는 배를 탔어요. 세월호 같은 여객선이었어요. 밤새 배를 타고 가면서 다른 승객들과 게임을 하면서 놀고 또 불꽃놀이도 보고요. 정말 즐거웠던 추억이거든요. 그런데 2년 뒤에 세월호 사건이 난 거예요. 그래서 더 충격이었어요.”

하지만, 그에게 슬픈 사건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세월호 참사나 국정농단 당시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독일 뉴스에서도 주요하게 보도된 일을 설명했다. “이게 진정한 민주주의”라며 감탄하는 독일 네티즌의 댓글에 뿌듯했다고 한다.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 때는 독일 방송에서 개막식 중계도 했다.

“독일 사람들이 스포츠에 관심 많아서 올림픽 방송은 대부분 시청하거든요. 거기서 개막식 중계를 하면서 단군신화 같은 한국의 전통이나 문화를 알리고 해설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간 한 일 중 가장 보람 있었죠.”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쳐온 피아노 실력으로 2017년부터 미니앨범을 포함해 세 장의 앨범을 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는 어릴 때부터 쳐온 피아노 실력으로 2017년부터 미니앨범을 포함해 세 장의 앨범을 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화의 희열’이라는 본격 인터뷰 프로그램에도 참여했죠. 여러 사람의 인생에 들어가보니 어떻던가요.

“정말 사전에 준비를 많이 하는 프로그램이이에요. 게스트가 정해지면 제작진이 먼저 패널들에게 궁금한 점을 먼저 적어 달라고 해요. 제가 잘 아는 사람이면 막 쓰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 사전에 저도 알아보고 공부를 해야 하죠. 그래야 궁금한 게 생기니까요. 서너 시간 동안 자료나 기사를 찾아서 제작진에게 질문지를 보내면 제작진은 그걸 취합하고 또 나름대로 조사를 해서 다시 16쪽 정도 분량의 질문을 패널들에게 보내요. 그럼 우리는 그것에 또 답을 해야 하죠. 그래야 전체 대략의 대본을 쓸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60쪽 분량의 대본이 완성돼요. 사실 방송은 필수적인 멘트만 가지고 들어가지만요. 그 방송이 정말 좋았던 게 한국 사람들도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그 프로그램에서 만날 수 있었죠. 외국인으로서 영광스러웠어요.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을 만나 보면서 나 자신을 엄청 돌아보게 됐어요. 그들이 자기 분야에서 성공할 때까지 얼마나 올인하고(쏟아 붓고)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죠. 나는 그런 나만의 분야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하고요.”

-그들이 성공하기까지 탄탄대로만 걸었던 건 아니죠.

“공통점이 ‘위기 속에 기회가 있었다’는 거였어요. 모든 게스트들이 다 그랬어요. 인생에 고비가 왔을 때는 버티면 다시 기회가 왔고 그 때부터 잘됐죠. 포기하지 않았던 거예요. 한 사람의 인생을 파고 들어가서 그 사람이 어떤 일을 겪었고 그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정신세계를 확인하니까 지금 왜 이렇게 살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 알겠더라고요. 그게 ‘대화의 희열’의 가장 큰 장점이었어요. 개인적으로 ‘대화의 배움’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었어요. 책보다 대화를 통해서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잖아요. 소크라테스가 그러니 시장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했나 봐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본인 인생의 고비가 떠오르기도 했을 듯해요. 인생에 고비가 있었나요.

“세 가지가 있었어요. 첫 위기는 군대 대신 봉사활동을 갔던 스페인에서였어요. 마드리드에 있는 독일성당과 실버타운에서 일했죠. 스페인이 어떤 나라인지 궁금했고 좋아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선택한 거였어요. 그런데 성당의 신부가 동성애자였어요. 우울증도 있었죠. 저한테 사랑 고백을 했는데 제가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분명히 하고 (둘 사이에) 벽을 치니까 그때부터 엄청나게 괴롭혔죠. 그래서 일을 미친 듯이 많이 했어요. 어쨌든 나의 상사였으니 방법이 없었죠. 독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그간 봉사를 한 게 무효가 돼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으니까요. 최대한 신부를 피했어요. 마지막 근무 때도 일부러 밤에 떠났죠. 너무나 거기에 있기 싫었거든요. 인사도 하지 않고 바로 짐 싸서 버스 타고 공항으로 갔죠. 다음날 아침 11시 비행기였는데 잠도 공항에서 잤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때 16㎏이 빠져서 53㎏이 됐죠. 제 키가 179㎝인데 말이에요.”

-세상에, 정말 괴로웠을 거 같아요. 어떻게 견뎠어요?

“최근에 고비가 왔을 때도 느낀 건데 진짜 힘들 때는 책이나 음악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힘들수록 피아노도 치기 싫더라고요. 그런 때 저한텐 운동이 답이더라고요. 몸이 정신도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스페인에서, 지금 생각하면 약간 미친 사람 같았을 정도인데, 매일 아침마다 지하 주차장에서 운동을 했어요. 갈 데도 없고 또 그 신부가 일을 너무나 많이 시켜서 시간도 없었고요. 그래서 새벽 6시에 지하주차장에서 운동하고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을 했죠. 제가 운동을 하는 모습을 봐서인지 그 신부도 저를 건드리지는 못했어요. 다만 화가 났을 때 물건을 던지거나 한 일은 있었죠. 관할 교구에서 그 신부에게 해명을 하라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저뿐 아니라 그 신부 때문에 힘든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교구에 그들이 항의를 한 거죠. 그 편지를 열어 보다가 신부가 자기가 쥐고 있던 날카로운 집기를 던졌는데 제 쪽으로 날아온 거예요. 제 귀 옆을 스쳐갔죠. 지금 생각하면 진짜 아찔해요. 독일로 돌아가서 심리 상담도 받았죠.”

-두 번째 고비는 뭐였나요.

“한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취업이 안 됐을 때예요. 원래 저는 (주한) 독일대사관이나 유엔(UN)같은 국제기구, 또는 독일 기업에 취직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모두 떨어졌죠. 두 달 남짓 동안 이력서를 40곳도 넘게 냈죠. 심지어 대학교 독문과의 원어민 강사도 안 됐어요. 나중에는 학원 강사라도 당분간 하려고 지원했는데 거절 당했죠.”

-왜요.

“한국말을 할 줄 안다는 이유로요. 그래서 결국 여기(한국)서는 취업이 안됐고 비자는 기한이 만료돼서 독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2013년 6월에 논문을 제출했는데, 9월에 비자 기한이 끝났죠. 독일에 가서도 일을 찾았어요. 그런데 또 제가 독일에서 일하는 데 필요한 자격은 없더라고요.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독일인을 찾는 회사가 없었죠. 제 관심분야를 연구하는 오스트리아의 교수 밑에서 박사를 하려고 지원을 했는데 거기서도 거절 당했죠. 이미 제자가 많다는 거였어요. 아직도 거절 이메일을 받은 날 기억이 나요. 그걸 읽고 일단 집 앞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나갔어요. 그런데 거기에 채용공고가 붙어있더라고요. 밤에 마트 진열대에 물건을 채워 넣는 일이었어요. 이거라도 해보자 해서 3개월동안 하루 5시간 아르바이트를 했죠.”

-그때는 어땠어요.

“세 가지 이유에서 좋았어요. 그 기간에 다시 겸손해졌죠. 사실 전에는 대학에서 칭찬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건방졌어요. 둘째는 그렇게 번 돈으로 2주 동안 친구랑 유럽 여행을 갈 수 있었거든요. 셋째는 독일에 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한국에 있었거나 오스트리아에서 박사 과정을 하고 있었다면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킬 수 없었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1, 2주쯤 지나서 ‘그래, 다시 한번 알아보자’ 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아직 워킹홀리데이 비자에 해당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다니던 도장에 가서 사범을 하면서 계속 회사에 지원을 했죠. 그 때 소규모 회사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하는데, 취직한 지 두세 달 됐을 때 (‘비정상회담’) 방송 섭외가 들어왔죠.”

그는 마지막 고비는 말하길 꺼렸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일에는 전혀 지장 없는 성격의 사건이지만 아직 누군가에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완전히 고비를 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잘 견디고 있는 듯했다.

◇성공보다 중요한 것

이른 시기에 찾아온 인생의 고비는 그에게 '어떤 어려움이든 한번 와 봐'할 수 있는 맷집을 길러줬다. 홍인기 기자
이른 시기에 찾아온 인생의 고비는 그에게 '어떤 어려움이든 한번 와 봐'할 수 있는 맷집을 길러줬다. 홍인기 기자

-그 고비들이 자신한테 준 게 뭔가요.

“더 이상 놀랄 게 이제 없어요. 하하. 어려움이 왔다고 해서 ‘아, 어떡하지’ 하지 않죠. 어릴 때 다 겪어서요. 하하. 취업이 안 되면 어때, 좀 버텨보지 뭐. 성실하게 뭐라도 하면 길이 열리겠지. 그래도 안 되면? 내 길이 아니구나 생각하면 되고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엄마와 달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보수적이셔서 항상 남을 도와주고 남이 나를 이용하려고 해도 받아 들여야 한다고, 인간관계에서 평화를 강조하셨거든요. 그런데 스페인에서 그런 경험을 한 번 해 보니까 이제는 어떤 사람이 와도 감당할 자신이 생겼어요. 어떤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도 ‘어, 그래? 스페인에 한 번 가봐. 그 신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할 수 있죠. 지금은 거리에서 우연히 그 신부를 만난다면 ‘신부님, 커피 한 잔 하실래요’ 하면서 ‘그 때는 왜 그랬어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고약한 신부 때문에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고, 취업이 안돼서 미래를 낙담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네요.

“좋았던 게 있었으니까요. 스페인에서 그런 경험을 하면서 어릴 때 관심을 가졌던 한국을 다시 떠올리고 한국으로 떠날 수 있었죠. 취업이 안 돼서 힘들긴 했지만, 그 전에 대학원을 다니면서 즐거웠거든요. 조교 하면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요. 그런 경험을 했으니까 방송이나 강연에서 학생들에게 그 의미를 얘기할 수 있는 거고요. 다시 태어나도 스페인에 다시 갈 거예요.”

-그러니 ‘대화의 희열’에서도 게스트들의 얘기에 공감이 많이 됐겠네요.

“맞아요. 그래서 모든 사람은 꼭 실패했으면 좋겠어요. 그 경험을 통해 진짜 성장을 하고 강해지거든요. 지금 당장 뭐가 안 되더라도 (안 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어요. 꿈을 가져라, 꼭 성공해라 이런 얘기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가치관이 더 중요하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은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실패야 말로 정말 필요하죠. 다만 실패를 어떻게 할 지가 중요하니 제대로 실패해 봐야 해요.”

아는 사람은 알지만 그는 피아노 연주도 앨범을 낼 만한 실력이다. 2017년부터 해마다 앨범을 내왔다. 연주만 한 게 아니라 모두 그가 작곡한 곡으로 채웠다.

-피아노는 언제부터 쳤나요.

“엄마가 열 살 생일에 피아노 레슨 받을 기회를 선물 해주셨죠. 열다섯 살까지 배우고 그 후에는 파이프 오르간을 배웠어요. 우리 가족이 전부 하나씩 악기를 다룰 줄 알았거든요. 저는 어릴 때 삼촌이 피아노 치는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 배웠고요. 방송 외에도 다른 활동을 하고 싶어 앨범을 냈어요.”

또 엉뚱한 질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는 이번에도 제대로 답했다.

-피아노는 다니엘씨에게 뭔가요.

“피아노는 휴식이에요. 정신적 휴식. 다른 세계죠. 소리에 푹 빠지면 다른 차원으로 가는 느낌이에요. 다 치고 나서도 그 소리가 계속 들리면 좋겠는데 안 들리니 가끔 서운할 정도로. 집에서 경리단길이 다 보이거든요. 혼자 창문을 열어놓고 헤드셋 (전자)피아노에 연결해서 쓰고 치면 와…! 너무 좋아요. 다음날 일어나면 다시 일상인데, 잠깐 휴가 갔다 온 느낌이죠. 그 열정을 뒤늦게 알았어요. 오르간 배울 때 밤에 성당으로 연습하러 갔거든요. 그때는 성당이 깜깜하고 앞에 촛불만 보여요. 성당의 큰 오르간 앞에 앉아서 치면, 아~ 그건 경험한 사람들만 알아요.”

그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피아노와 오르간을 치며 충만했던 시간으로 거슬러갔다. 그의 얘기에 어릴 때 피아노를 치다 그만둔 게 그렇게 후회될 수 없었다.

-합기도도 계속 하고 있죠. 돈을 받지 않고 사범을 하는 이유는 뭔가요.

“가르치는 것도 수련이거든요. 풀 타임 사범은 아니지만 스케줄이 없는 날 밤에는 무조건 도장에 나가서 성인부를 가르쳐요. 합기도의 매력이자 장점은 끝이 없다는 거거든요. 예를 들어 막기를 한다면, 합기도는 정해진 방법이 없어요. 또 상대의 체구에 따라서도 다르고요. 그러니 사범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수련을 하니까 연구가 되고 배울 수도 있는 거죠.”

◇믿음보다 행동이 중요해

자신의 역할에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의미를 찾으려 노력해온 삶의 태도가 지금의 그를 만든 것 아닐까. 홍인기 기자
자신의 역할에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의미를 찾으려 노력해온 삶의 태도가 지금의 그를 만든 것 아닐까. 홍인기 기자

-돌이켜보면 인생을 바꾼 계기나 결정적인 선택이 뭐였나요.

“인생을 바꾼 결심은 방송이었죠. 타이밍이 잘 맞았어요. 처음엔 별 생각 일단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시작했는데 인생을 완전히 바꾼 거죠.”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나요.

“현재에 충실하다 보면 미래가 열리겠죠?”

-지금 행복한가요.

“네. 행복이라기 보다는 만족이네요. 최근에 있었던 씁쓸한 일 때문에 조금 다운되기는 했지만, 만족스러워요. 제가 이해하는 행복은 웃으면서 달리는 건데, 그건 생물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에너지 소비가 많이 되니 늘 웃을 수는 없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늘 웃으며 사는 사람은 없잖아요. 하지만 만족감이 높아요.”

-평정심을 늘 잘 유지하는 것 같아요.

“제가 10월생인데 천칭자리라서 그럴까요. 천칭자리의 특징이 저울처럼 균형을 잡으면서 생활하는 거래요. 사는 데 정답이 없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죠. 각자 살아온 배경이 다르니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사생활에서는 화낼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방송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일 일은 거의 없어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고자 했던 원칙, 삶의 도가 뭔가요.

“합기도?”

-네? 하하하.

“진심인 게 합기도(合氣道)의 도자가 길 도자니까요. 자기 수양을 해서 인간으로서 좀더 발전하자는 개념이잖아요. 나도 행복하고 남의 행복도 도와주자고 생각해요. 저는 믿음보다 행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라서요. 나도 많이 부족하고 많이 산 사람도 아니지만 주위에 적어도 좋은 영향을 끼치며 살자, 그게 삶의 원칙이에요. 다만 내 행복을 완전히 희생하면서 남의 행복을 위해주는 건 안 되고요. 내가 우울하고 불만족스럽고 행복하지 않은데 봉사를 할 수는 없죠. 내 인생이 행복해야 남의 인생도 도울 수 있으니까.”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마치 대화의 희열 다니엘 편을 찍은 기분”이라고 웃으며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와 나눈 대화엔 희열도, 그의 표현대로 배움도 있었다. 그간 그를 독일인이라고 생각했지 한국이라는 공동체 속의 독일인으로 강하게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는 그저 방송에 출연해 돈 버는 재미를 좇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찾으려 고민하고, 이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기만의 몫을 연구해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정당한지 자문한다. 답은 거기 있는 게 아닐까.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인생에서 부닥치는 모든 문제의 답이 있는 법이니까. 그의 어머니가 말했듯, “다니, 지금 잘하고 있어. 걱정하지 말아.”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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