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항아리의 불행

입력
2019.07.22 04:40
27면
영화 '터널' 스틸 이미지. 쇼박스 제공
영화 '터널' 스틸 이미지. 쇼박스 제공

변호사로 일하면서 수많은 사건의 의뢰인들을 만나 상담을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힘든 시련과 역경이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돌멩이가 항아리 위에 떨어져도 항아리의 불행이고, 항아리가 돌멩이 위에 떨어져도 항아리의 불행이다. 우리의 삶이 바로 항아리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시련과 고통은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 불가피하다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시련과 고통이 찾아 오고,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나도 가끔은 안 풀리는 일이 있고, 이런 급변하는 시대에 어떤 적응을 통해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잠 못 이룰 때도 많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영화 ‘터널’(Tunnel, 2016)의 한 장면을 생각한다. 무너진 터널 속에 한 남자가 갇혀 있다. 여전히 붕괴의 위험이 감지되는 아슬아슬한 상황, 추위와 배고픔과 함께 점점 짙어지는 어둠, 이 모든 것들이 두렵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언제 구조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반드시 살아 나가겠다는 의지 하나로 하루하루를 버텨 낸다. 그런데 이 남자가 뜻밖의 모습을 보여 준다. 눈금까지 그어 조금씩 아껴 먹던 물을 마치 와인 마시듯 우물우물 음미하며 마시고, 꿈적하기도 힘든 찌그러진 차 안에서도 최대한 편히 누울 공간을 찾아 자신의 옷을 야무지게 덮고 잔다. 터널 속에 갇힌 하정우의 모습은 만성 경기침체, 과중한 가계부채, 고용 불안정 등에 시달리는 우리의 모습과 정말 똑같다. 그런데 주인공은 그 절박하고 고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찾아내 즐긴다.

고난과 역경은 미친 개에게 물린 것처럼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나 행동과는 아무 관련 없이 그냥 발생하는 것이다. 힘든 고통이나 역경에 처했을 때 사람은 가장 크게 변한다. 극한 상황이나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본 사람은 인생관이 변하기 마련이다.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도전과 응전을 핵심모티브로 삼아 인류가 발전할 수 있는 동인을 거친 환경과 가혹한 고난에서 찾았다. 청어를 머나먼 북해에서 그냥 운반할 때는 거의 다 죽어버렸지만, 천적인 물메기 몇 마리를 수조에 넣은 다음 운반했을 때에는 대부분 싱싱한 상태에서 건너올 수 있었다. 적당한 긴장과 위협이 청어를 더욱 활기차게 만든 것이다.

살면서 아무 문제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죽은 사람들 뿐이다. 당신이 만일 아무 문제도 갖고 있지 않다면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당신이 쓸모 없는 존재이고, 무덤으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진주도 고통과 상처가 있다. 영롱한 진주도 처음에는 상처였다. 진주조개는 몸 속에 상처를 낸 침입자 모래알갱이를 뱉어내려 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체액으로 그 모래알을 두텁게 감싼다.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다해 그 상처를 보듬고 감싼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보석을 만드는 일이다. 몸 속에 들어온 상처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상처의 고통을 견디는 적극적인 인내의 힘이 진주의 아름다움을 탄생시킨다. 걱정과 어려움이 우리를 살게 하고, 안락함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 누구에게나 문제가 있고, 시련과 고통이 필연적으로 다가 온다. 사람에게는 상처가 필요하고, 눈물이 필요하고, 슬픔이 필요하다.

상처받고 시련을 겪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상처와 눈물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는 강이 하나 있다. 수심은 그리 깊지 않지만, 물살이 무척이나 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강을 건널 때 무거운 돌을 하나씩 짊어진다. 거친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짊어지고 건너는 것이다. 지금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거친 강물에 휩쓸리지 않게 해 줄 고마운 돌인 것이다.

윤경 더리드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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