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본다, SF]20세기에 살던 흑인 여성, 어느날 19세기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입력
2019.07.19 04:40
22면

 ※ 과학소설(SF)을 문학으로, 과학으로, 때로 사회로 읽고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에 격주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12>옥타비아 버틀러의 ‘킨’ 

다나는 스물여섯 살 생일날 집에서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낀다. 이게 웬일인가. 정신을 차린 그가 있는 곳은 물살이 빠른 강가다. 강에서는 한 남자아이가 허우적대고 있다. 앞뒤사정을 헤아릴 때가 아니다. 그는 곧바로 강으로 뛰어들어 그 남자아이를 구한다. 남자아이의 이름은 루퍼스. 다나와 루퍼스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알고 보니, 다나가 루퍼스의 목숨을 구한 곳은 미국의 메릴랜드주. 다나가 살던 서부 캘리포니아주에서 동부 메릴랜드주로 순간 이동을 한 것이다. 놀랄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20세기 후반에 살고 있던 다나가 어지럼증을 느끼고 나서 깨어난 시점은 19세기 초반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다나에게 이런 시간여행은 목숨을 걸어야 할 재앙이다. 왜냐하면 그는 피부색이 까만 흑인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미국에는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할 때까지 노예 제도가 존재했다. 실제로는 4년간의 남북 전쟁이 끝나고 나서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 뒤에야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1868년).

이제 20세기 후반을 살던 흑인 여성이 19세기 한복판으로 떨어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이 될 것이다. ‘도망 노예’로 오해받아 채찍질을 당하고 나서 헐값에 새로운 주인에게 팔려가기 십상이다. 백인 남성의 성욕을 해결하는 성노예가 되거나, 심지어는 사람에게 맞거나 개에 물어 뜯겨 죽을 수도 있다.

다행히 첫 번째 시간여행에서 다나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운 좋게 20세기 후반의 현실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다나가 결코 원하지 않던 시간여행은 그 뒤로도 몇 차례 계속된다. 여러 명의 노예를 거느린 백인 농장주의 아들 루퍼스의 생명이 위협을 받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나는 19세기로 소환된다.

도대체 다나와 루퍼스는 무슨 관계이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이 목숨을 건 시간여행은 과연 어떻게 끝날까. 지적이고 매력 넘치는 20대 여성 작가가 갑자기 노예가 되었을 때, 그는 끔찍한 상황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와 루퍼스 사이의 악연은 어떻게 끝날까. 옥타비아 버틀러는 이런 기막힌 이야기를 ‘킨’에서 펼쳐 놓는다.


 킨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ㆍ이수현 옮김 

 비채 발행ㆍ520쪽ㆍ1만4,500원 

짐작하다시피, ‘킨’의 저자 버틀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 여성이다. 그는 ‘흑인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굴레를 SF 안에 녹여 낸 최초의 작가로 꼽힌다. ‘킨’을 읽어 보면, 이 소설이 버틀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의 문제점을 기발한 상상력과 상투적이지 않은 이야기로 풀어냈다.

좋은 SF 작품을 국내에 소개해 온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버틀러 덕분에 세계의 독자들은 전혀 새로운 상상의 지평을 경험했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더 깊고 넓은 통찰을 갖게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훨씬 더 풍성한 상상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버틀러를 읽은 독자는 그렇지 않은 독자와 분명히 다르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1979년에 나온 ‘킨’이 지금까지도 미국을 넘어 세계 곳곳에서 읽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천재 작가로 꼽히며 수많은 독자와 동료 작가에게 영감을 줬던 버틀러는 2006년 2월 24일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의 다른 작품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플 뿐이다.

강양구 지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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