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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박자박 소읍탐방] 당진 합덕읍…합덕제와 버그내순례길
당진 합덕읍 신리성지.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밭 위로 순교미술관 상층부만 하늘로 돌출돼 있다. 조경이 아름다워 예쁜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자주 찾는데, 성당 측은 관광지가 아니라 종교시설인 만큼 기본 에티켓은 지켜달라고 당부한다. 당진=최흥수 기자

‘탐관오리 정규야, 합덕 방죽 물고기가 다 네 꺼냐?’ ‘장녹수야! 연산군 빽 믿고 물장난 하지 마라.’ 27일까지 연호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당진 합덕제 주변에 내걸린 현수막이다. 얼핏 보면 축제에 불만을 품은 주민이 내건 구호 같다. 연꽃이 피어나는 호수 테두리에는 ‘예당호야, 합덕 방죽 엄마께 효도 좀 해!’ ‘견훤은 왜 예산 신암에 미사일을 쏘았나?’라는 현수막도 걸려 있다. 이게 다 무슨 소린가. 결론부터 말하면 축제 주최인 당진시에서 내건 호기심 유발용 현수막이다.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의림지 대신 황해 연백의 남대지를 꼽기도 한다)와 함께 조선 3대 관개시설이라는 합덕제를 조금이라도 더 알려보려는 전략이다.

◇장녹수의 탐욕, 이정규의 ‘갑질’…

합덕제는 당진 합덕평야에 물을 대기 위한 수리시설이었다. 길다란 방죽에 9개의 수문을 갖추고 인근 마을에 농업용수를 공급했다. 둑을 보수할 때마다 기록을 적어 둔 중수비가 5기 남아 있지만, 아쉽게도 맨 처음에 관한 기록은 없다.

조선 3대 수리시설로 꼽히는 합덕제는 현재 연꽃 호수로 조성돼 있다. 27일까지 연호문화축제가 열린다.
합덕제 호수 주변에 호기심 유발용 현수막이 걸려 있다.

‘견훤과 미사일’은 방죽을 처음 쌓은 시기를 설명하기 위한 문구다. 합덕제는 견훤이 후고구려와 싸울 때 병사와 군마에 물을 먹이기 위해 축조했다고 전해진다. 신라 말기에 견훤은 이곳에 둔전을 개간하고 병사 1만2,000명과 말 6,000필을 주둔시켰다. 삽교천을 사이에 두고 왕건과 대치하던 견훤은 군량 조달이 용이한 합덕평야 인근에 성동산성을 쌓았다. 최후의 승리자는 왕건이었지만, 견훤이 성동산성에서 쏜 화살이 왕건이 주둔하고 있던 예산 신암면까지 날아갔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직선으로 5km가 넘는 거리이니 허풍이 지나치긴 하다.

탐관오리 이정규를 규탄하는 현수막은 합덕농민항쟁과 관련이 깊다. 1894년 1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이정규의 탐욕과 포학에 격분한 합덕제 주변 6개리 농민의 항쟁이다. 이들은 이정규의 악행을 정리해 관할 홍주(지금의 홍성) 목사에게 제출했지만, 돌아온 것은 오히려 이정규의 살해 협박이었다.

주민들이 ‘혈원록’에 적시한 이정규의 악행을 요약하면 대충 이렇다. ‘자신의 저수지에서 연근을 채취하는데 수시로 농민을 동원했으며, 때로는 농민을 위협해 재산을 빼앗았다. 재산을 빼앗긴 농민이 찾아와 애원하자 합덕제에 익사시켰다. 동네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웅덩이의 물을 퍼내면 어느새 나타나 모두 빼앗아 갔다. 농민에게 자신의 노비와 혼인할 것을 요구하다 거절하면 족보를 빼앗아 물속에 던졌다. 이정규가 주민에게 수탈한 금전은 모두 3만 7,000냥이 넘었고 다른 포학도 헤아릴 수 없다.’ 요즘으로 치면 ‘갑질 중의 갑질’이었다. 합덕농민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은 같은 해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서도 지역의 활동을 주도했다.

합덕제 호중도로 연결된 산책로의 우산 장식.
호중도에서 연결된 전망 데크. 합덕과 당진 땅은 어디를 둘러봐도 드넓은 평야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후궁에 오른 장녹수도 합덕제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다. 후궁이 된 장녹수는 연산군의 비뚤어진 욕망을 부추기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 나갔다. 장녹수가 연산군으로부터 하사받은 땅과 집 중에는 합덕제도 포함돼 있었다. 정확하게는 합덕제 안에 있는 땅이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지라 저수지 안에 경작지를 넓히다 보면, 수리시설의 기능은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 중종실록에는 ‘제언(둑)에 물이 없더라도 국법에 일반인의 경작은 허하지 않는 것입니다. 청컨대 (장녹수가 받은 경작지를) 사급하지 마소서’라는 상소가 등장한다.

주변 일곱 개 마을 넓은 들에 물을 대던 합덕제의 기능은 1960년대 초 인근 예산군에 예당저수지를 신축하면서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79년 삽교천 방조제 완공으로 현재 예당저수지도 농업용수 공급 기능을 삽교호에 내어 준 상태다.) 예당저수지 완공 후 합덕제는 일반 농지로 분양해 완전히 망가졌다가 현재 일부만 복원한 상태다. 1915년 지도에서 당시 저수지 둘레가 4.5km에 이르렀지만 현재는 1,171m만 남아 있다. 저수지 일부를 연꽃 호수(연호ㆍ蓮湖)로 가꾸고, 제방과 장녹수의 땅이었던 호중도를 산책로로 연결해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합덕제와 연결된 합덕농촌테마공원.
농촌테마공원에는 더위를 식힐 바닥분수와 발을 담글 수로가 조성돼 있다.
농촌테마공원의 ‘천상열차분야지도’ 조형물.

합덕제 초입에는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합덕에서 예산으로 연결되는 삽교천 주변엔 끝없는 들판이 펼쳐진다. 아산만에서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흘러 들어 ‘안개(내포)’라고도 하고, 너른 들에 소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소들평야’라고도 불리는 예당평야다. 삽교천 주변 들녘은 오래 전부터 간척과 관개로 넓혀지고 다져져 왔다. 덕을 모은다는 의미의 ‘합덕(合德)’도 제방을 다질 때 주민들이 호흡을 맞춘 가락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수리민속박물관은 예당평야와 삽교천 주변 수리시설 현황과 역사를 두루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을 나가면 ‘합덕 농촌테마공원’으로 이어진다. 바닥 분수에 뛰어들거나 맑은 물이 흐르는 수로에 발을 담그며 한여름 무더위를 식힐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돌에 새긴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모형도 재현해 놓았다. 농업과 천문의 관계를 상징하는 전시물이다. ‘합덕 방죽에 줄남생이 늘어 앉듯’이라는 속담처럼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기를 바라는 희망이 엿보인다.

◇초기 한국 천주교의 성지, 버그내순례길

농촌테마박물관 언덕에는 합덕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1929년 건축된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정면은 고딕 성당 특유의 강직한 권위가 느껴지지만 측면으로 돌아서면 빛바랜 벽돌이 고풍스럽다. 반 원통 모양의 내부 천장은 소박하면서도 단정하다. 성당 입구에 지난주 막을 내린 KBS 수목드라마 ‘단 하나의 사랑’ 촬영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얕은 언덕이지만 부근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라 성당 앞 뒤로 들판 풍경이 넉넉하게 펼쳐진다.

고딕양식의 합덕성당. 유럽의 오래된 교회처럼 고풍스럽다.
성당 내부도 화려한 장식 없이 단아하고 기품이 있다.

합덕은 박해로 점철된 초창기 한국 천주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 탄생지 솔뫼성지에서 합덕성당을 지나 끊임없이 순교자가 나온 신리성지까지 약 13km에 거쳐 ‘버그내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버그내’는 삽교천의 다른 이름이다.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강줄기 중 안성천에 버금가는 하천이라는 의미다. 삽교천의 다른 이름인 범천이 ‘범해-범근내-범근내포’로 변했다가 부르기 편하게 ‘버그내’로 굳어졌다는 설도 있다. 천주교는 버그내를 통해 자연스럽게 내륙 깊숙이 전파됐고, 합덕을 중심으로 한 내포에서 국내 어느 곳보다 넓고 깊게 뿌리를 내렸다.

김대건 신부(1822~1846)가 태어난 솔뫼성지는 행정구역상 당진시 우강면이지만 합덕 읍내와 불과 2km 떨어져 있어 누구나 합덕으로 간주한다. 소나무가 산(뫼)을 이루었다는 지명처럼 아담한 솔숲으로 꾸며져 있다. 그 사이로 ‘십자가의 길’이 산책로처럼 조성돼 있고, 김대건 신부 동상과 생가, 기념관과 기념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김대건 생가는 면천(현 당진시 면천면) 군수의 직을 버리고 신앙 생활에 전념한 증조부 김진후, 조부 김한현, 부친 김제준, 그리고 자신까지 4대가 살았던 곳이다. 앞마당에는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의자에 앉아 기도하는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에는 1836년 16세 때 신학생으로 뽑혀 마카오로 건너가 공부하고, 1845년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아 귀국한 후 불과 1년이 못 된 1846년 6월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기까지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와 천주교 박해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솔뫼성지 입구의 프란치스코 교황과 김대건 신부 조형물.
솔뫼성지 입구. 운치 있게 휘어진 소나무가 관람객을 맞는다.
솔뫼성지 안 ‘십자가의 길’의 조형물.

합덕읍 신리는 조선에서 가장 큰 천주교우 마을이자 선교사들의 은신처였다. 사방이 들판으로 탁 트인 신리성지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은거한 곳으로 한국의 카타콤바(로마시대 지하교회)에 비유된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논산 강경에 첫발을 내디딘 후 1866년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기까지 21년간 조선에서 활동했다. 신리 손자선의 집에 은거하며 그가 수집한 조선 자료와 순교자의 행적은 훗날 샤를르 달레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의 기초가 됐고, 103위 성인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드넓은 평야에 자리 잡은 신리 성지. “기본 에티켓은 지킵시다!” 기도 공간인 경당(삼각지붕)에서 민망한 포즈로 ‘인생사진’을 찍으려는 방문객들 때문에 관리하는 수녀님이 골머리를 앓는다고.
신리성지의 순교미술관. 지하에 한국 천주교의 전파와 박해를 주제로 한 13점의 그림이 전시돼 있다.
신리성지 순교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이종상 화백이 재능기부로 그렸다.

신리성지의 주차장에서 성당에 이르는 길에는 연못과 잔디밭이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그 사이사이에 다블뤼 주교를 비롯해 다섯 성인의 삶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경당이 설치돼 있다. 순교미술관은 신리성지의 자랑이다. 이종상 화백이 재능기부로 한국 천주교 순교의 역사를 기록한 13점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이 화백은 5만원권의 신사임당 초상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평평한 들판에 우뚝 솟은 순교미술관 꼭대기에 오르면 푸르름이 짙어 가는 내포평야의 풍광에 가슴이 뻥 뚫린다.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은거한 손자선의 집.
순교미술관 꼭대기 전망대에 오르면 푸르름이 짙어가는 들판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합덕평야 드넓은 농로에 승용차 한 대가 지나고 있다.

사진 찍기 좋은 ‘SNS 성지’로 알려지면서 요즘 신리성지는 관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인생사진’을 건지려는 이들이 기도 공간인 경당에서 민망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일이 다반사고, 순교미술관에서 낯 뜨거운 행동을 하는 관람객도 종종 목격된다고 한다. 신리성지는 따로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두 명의 수녀가 넓은 잔디밭과 미술관, 화장실을 관리하고 있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도 기본 에티켓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관광지이기 전에 종교시설이다.

당진 여행 지도. 그래픽=송정근 기자

당진=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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