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냉전 종식에 기여한 페어웰 문건(7.19)

입력
2019.07.19 04:40
30면
구독
페어웰 문건을 소재로 한 2009년 프랑스 첩보스릴러 영화 '페어웰'(Chirstian Carion 감독) 포스터.
페어웰 문건을 소재로 한 2009년 프랑스 첩보스릴러 영화 '페어웰'(Chirstian Carion 감독) 포스터.

‘페어웰(Farewell)’은 냉전기 프랑스 국토감시부(DST)를 위해 일한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과학 기술정보 분석요원의 코드명이다. 불어가 아닌 영어 코드를 부여한 까닭은 발각되더라도 미국 정보부(CIA) 요원으로 오인해 그를 특정하기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1981~82년 4,000여건의 KGB 비밀 문건을 DST에 전달, 미국 보수 논객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 같은 이들이 냉전 승리의 결정적 전기로 꼽은 1982년 6월의 시베리아 가스전 대폭발을 가능하게 했다.

블라디미르 베트로프(Vladimir Vetrov, 1932~1985)가 왜 이중첩자로 전향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소비에트 체제에 환멸을 느꼈다’는 게 알려진 사연의 전부다. 그는 KGB 서방 과학기술정보 작전국(Directorate T)의 고위 정보분석요원으로, 주 임무는 ‘라인X(LineX)’라 불린 서방 소비에트 정보원들이 수집한 정보 가치를 평가하는 거였다. 반도체, 컴퓨터 하드ㆍ소프트웨어 등 첨단 과학 및 산업 기술 정보와 NATO 방위ㆍ군사 기술정보가 그가 주로 다루던 정보였다. 그의 문건에는 라인X 250여명 외에 그들과 정보를 거래한 서방 관료, 군인, 과학ㆍ기술인 등 명단이 포함돼 있었고, 이미 러시아로 넘어간 정보와 작전 중인 정보의 목록 다수도 포함됐다. 그중 하나가 미국-캐나다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자동제어 소프트웨어였다.

당시 독일과 영국은 중동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연 80억달러 규모의 시베리아 천연가스 도입을 추진 중이었다. 프랑스 등 나머지 유럽 국가와 미국은 그 계획을 못마땅해했다.

1982년 7월 19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서방정상회의 기간에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페어웰’의 존재를 알렸고, 부시 부통령과 윌리엄 케이시 CIA국장이 역공작을 주도, 러시아에 바이러스에 감염된 가스제어 소프트웨어를 넘김으로써 파국적인 폭발사고가 일어나게 했다. 러시아는 막대한 투자 비용과 잠재 수익원을 잃었고, 결과적으로 개혁ㆍ개방을 앞당겨야 했다고 한다. 베트로프는 사고 직후 KGB에 적발돼 1985년 처형당했다. 1983년 처형설도 있다. 최윤필 선임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