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재판 증언 직후 한 흑인 형사와 담소 중인 윌리 리드(오른쪽). AP 연합뉴스

1955년 12월 로자 파크스의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이 흑인 시민권 운동의 기폭제가 된 건, 당연히 그 사건이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져 폭넓은 호응을 얻은 덕이다. 유사한 일은 파크스 이전에도 없지 않았고, 메이저리그 영웅 재키 로빈슨도 무려 11년 전인 1944년 유사한 일로 버티다 벌금을 문 적이 있었다. 부당하게 짓눌리면서도 끝내 존엄과 용기를 잃지 않은 파크스의 기품도 물론 예외적이었지만, 그 사연을 유인물로 만들어 적극적으로 알린 그의 이웃들, 즉 지역 여성정치위원회(WPC)와 흑인교회를 중심으로 한 활동가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양상은 아마 달랐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무렵 미국 남부 흑인들은 버스 분리 차별에 저항할 수 있을 만큼의 사기와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파크스의 용기와 그의 이웃들의 분노에 힘을 보탠 일 가운데, 5개월 전 미시시피주에서 14세 흑인 소년 에밋 틸(Emmett Till)이 피살된 사건이 있었다. 남부 인종차별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시카고 소년 틸이 방학을 맞아 외조부네에 놀러 왔다가 식품점을 운영하던 21세 백인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었다는 누명을 써, 그 여성의 남동생과 남편 등에 의해 무차별 폭행 끝에 살해된 사건.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 시신을 닷새간 대중에게 공개하며 정의를 호소했다.

두 피의자는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하지만 그 뻔한 재판의 증언대에 서서 피고의 죄상을 폭로한 이가 있었다. 목화농장 노동자였던 18세의 윌리 리드(Willie Reed, 1937~2013)였다. 그는 알지도 못하는 14세 소년의 정의를 위해, 피의자들이 틸을 차에 태워 끌고 가는 걸 보았고 틸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는 증언을,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증언했다.

재판 직후 그는 시카고로 피신, 성을 ‘루이스(Louis)’로 바꾸고 병원 잡역부로 남은 생을 살았고, 아내에게조차 1984년에야 이와 같은 사실을 고백했다. 2003년 한 프리랜스 작가의 인터뷰 요청으로 그는 재판 전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이후 방송에도 얼굴을 보였다. 그는 “그런 일을 마치 없었다는 듯 덮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사진으로 그의 시신을 보았는데,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2013년 7월 18일 별세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