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대한조현병학회ㆍ한국일보 공동 기획] ‘조현병 바로 알기’
⑨이명수 연세라이프정신건강의학과 원장(대한조현병학회 홍보이사)
조현병 환자에게 독립과 취업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이 궁극적인 회복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이거 제 월급으로 산 거예요. 저도 돈을 벌었어요.” 40대 후반의 조현병 환자인 이소명(가명)씨가 필자의 진료실에서 주스 한 통을 책상 위에 올려 놓으며 한 말이다. 15년 이상 조현병을 앓고 있는 소명씨의 사례를 통해 조현병의 만성화와 재활 과정, 그리고 우리 정신사회재활서비스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소명씨는 대학 졸업 후 회사원으로 근무하던 30대 초반에 피해망상과 환청이 생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알코올중독에 도박까지 하는 아버지였다. 소명씨는 아버지가 병원행을 막아 약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소명씨가 아버지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면서 조현병이 자주 재발했다. 재발 반복은 뇌기능을 퇴화시켜 회복을 점점 어렵고, 입원기간도 길어지게 만든다. 소명씨도 이런 과정을 거쳐 정신병원에서 장기 입원하게 됐다.

소명씨는 환청과 망상 때문에 횡설수설하고,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퇴행적인 행동으로 다른 환자들과 마찰이 잦았다. 가정 빈곤으로 소명씨는 사회취약계층에 정부가 치료비를 지원하는 의료급여 환자였다. 의료급여 환자의 정신병원 입원치료비는 하루 5만원 미만이다. 숙식비, 약제비, 검사비, 치료진 인건비 등을 포함한 모든 비용이 하루 5만원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

비싼 약을 먹으면 약값만으로 지원 한도에 도달할 수 있기에 값싼 약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새로 개발된 효과 좋은 치료제도 비싼 탓에 사용하기 어렵다. 그나마 2018년부터 외래 환자는 의료급여 정액제가 해소돼 고가 약물도 복용할 수 있게 됐지만 의료급여 입원 환자들은 여전히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

장기 입원 중인 그에게 희망을 준 사람은 형제들이었다. 형제들은 입·퇴원 악순환을 끊기 위해 아버지의 관여를 법적으로 차단했고, 소명씨의 회복을 돕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소명씨 역시 빨리 취업해 돈을 벌고 싶다고 되뇌었다. 회복가능성을 보이면 병원에서는 의료급여 정액제에 따른 손해를 감수하고 고가 약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소명씨에게도 이런 기회가 왔다.

그에게 부여된 기회는 클로자핀 복용이었다. 이 약은 현재 임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다른 어떤 치료제보다 효과가 뛰어나 다른 약으로 치료되지 않던 환자도 효과를 나타낼 때가 많다. 그런데 문제는 드물지만 백혈구 수가 줄면서 면역력이 떨어져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이 약을 복용하는 환자는 반드시 초기에는 매주, 나중에는 매달 혈액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런 불편 때문에 다른 약물로 치료되지 않을 때 최종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떻게든 회복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인 소명씨는 매주 혈액을 뽑아야 하는 불편을 감수했다. 이 약 복용으로 그의 증상은 점차 호전되면서 주변 사람들과 갈등이 줄었고 의사표현도 온순해졌다. 사회적 기능이 나아지면서 ‘지역사회 주거시설’로 옮겨 살면서 사회에 복귀해보고 싶다는 의견까지 얘기하게 됐다.

드디어 소명씨는 7년여의 입원을 마무리하고 지역사회 주거시설에 입소하게 됐다. 이 시설은 병원에 장기 입원해있던 정신질환자가 지역사회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적응을 돕기 위한 주거 및 복합서비스를 제공한다. 서울에서는 2005년, 경기도에서는 2018년에 설립돼 보건복지부의 ‘커뮤니티 케어’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소명씨는 지역사회 주거시설에서 6개월간 약물치료를 하면서 지낸 뒤 ‘공동생활가정’에 입소했다. 공동생활가정이란 5~7명의 환자가 함께 살면서 같이 거주하는 사례관리자의 지원을 받아 회복을 도모하는 기관이다. 이곳에 입소하는 환자들은 대부분 낮에 인근 정신재활시설이나 정신건강복지센터에 다니며 사회와 직업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소명씨 역시 직업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해 꾸준히 배우던 중 7개월만에 컴퓨터 부품회사에 취직했다. 비록 계약직에 단순한 업무보조였지만 소명씨에게는 아주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외래 진료 때 내민 주스 한 통을 통해 소명씨는 주치의에게 다른 수많은 장기 입원 환자도 재활과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소명씨는 장기 입원 환자가 재활하게 된 모범사례이지만 자신의 집에 거주하면서도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고 고립된 삶을 사는 만성 환자도 많다. 이들의 사회복귀를 돕기 위해 정부는 전국 시군구 보건소를 중심으로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센터에서는 환자들의 건강한 생활을 위해 일반상담, 가정방문, 외래동행, 약물 및 증상관리 등을 포함한 사례관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센터의 사례관리자가 담당해야 하는 등록환자 수가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3~4배나 돼 충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의료기관의 ‘낮 병원’과 민간 ‘정신재활시설’에서도 사회복귀를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아직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가족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만성 환자에게는 주거재활 서비스가 필요하다. 이들을 위한 주거시설 형태는 그룹홈, 중간집, 반독립 및 독립 주거시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비스는 우리나라에서 이제 시작단계로 아주 적은 수만 제공되고 있다.

조현병 환자에게 독립과 취업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이 궁극적인 회복이다. 이를 위한 기본 조건은 정기적 병원 진료와 적절한 치료제의 꾸준한 복용,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사례관리를 꼽을 수 있다. 또한 독립을 위해 주거재활, 취업을 위해 직업재활이 필요하다. 이러한 요건이 구비되면 비록 치료 초기에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 만성화됐을지라도 우리 사회 일원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모든 이에게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이명수 연세라이프정신건강의학과 원장(대한조현병학회 홍보이사)

web_cdn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