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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밤 10시 30분경 서울 마포구 대흥동의 어두운 골목을 한 여성이 지나고 있다. 인적 드문 밤길은 구형 나트륨 램프 가로등의 불그스름한 불빛을 받아 더욱 으스스하다. 이 골목은 귀갓길 여성들의 불안감을 해소할 목적으로 운영되는 ‘여성안심귀갓길(고산18길)’의 일부지만 인근 대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 사이에선 ‘무서운 길’로 더 알려져 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동대문구 답십리로30길.
서울 마포구 고산18길.
5일 바닥 조명이 켜진 마포구 고산18길. 주민들은 바닥 조명의 효과에 대해 의문을 나타냈다. 조모(30)씨는 “차량용 조명인줄 알았지 안전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다”고 말했고, 김덕순씨는 “햇빛으로 충전해서 밤에 쓰는 건데 낮이 흐린 날엔 꺼져 있기 일쑤”라고 전했다.

“앞서가던 여학생이 내 인기척에 화들짝 놀랄 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나 위험한 사람 아니라고, 나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 주민이라고 말해준다.” 서울 마포구 대흥동에 사는 여성 김덕순(60)씨는 8일 동네 ‘여성안심귀갓길’의 밤 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주민 강민혜(23)씨는 “이 길이 너무 무서워서 도로 건너편으로 돌아갈 때가 많다”고 말했다.

여성안심귀갓길은 경찰청이 ‘밤길 여성 안심 귀가를 위한 종합 대책’의 일환으로 2013년부터 지정해 온 범죄 예방활동 강화 공간이다. 6월 기준 전국에서 2,642곳이 운영되고 있는데, LED 조명과 비상벨, CCTV 등 다양한 방범 시설을 설치하고 순찰을 강화해 여성들의 귀갓길 불안감을 해소한다는 취지다. 그러나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서울 마포구와 동대문, 강북구 등에 위치한 여성안심귀갓길의 방범 시설 및 운영 실태를 살펴본 결과 ‘여성이 안심할 수 있을 만한’ 부분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1 어두운 골목, 불안한 귀갓길

김씨 말대로 여성들이 작은 인기척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원인 중 하나는 귀갓길에 내려 깔린 어둠이다. 단독 주택과 옹벽 사이로 난 대흥동 여성안심귀갓길(고산18길)의 경우 푸르스름한 바닥 조명이 줄지어 빛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두컴컴했다. 가로등이 부족하고 바닥 조명은 주변을 밝히는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귀갓길 중간 지점 50~60m 구간엔 구형 나트륨 램프 가로등 단 한 개만 설치된 데다 희미한 바닥 조명마저 없다. 캄캄한 골목은 밤 10시를 지나면서 행인의 발길이 뜸해졌고 더욱 으스스 해졌다. 주민 오모(28)씨는 “이 골목에서 필요한 건 바닥 조명이 아니라 밝은 가로등”이라고 말했다.

#2 접근 어려운 비상벨

위급 시 경찰관과 직접 통화할 수 있는 비상벨은 주차된 차량이나 공사장 안내판에 가려져 있기 일쑤였다. 심지어 동대문구 고산자로30길의 경우 지하차도 중앙 기둥에 비상벨이 설치돼 있어 누르려면 차도로 뛰어들어야 한다. 지난해 감사원이 경찰청에 통보한 ‘여성안심귀갓길 관리 부적정’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9월 기준 전국의 여성안심귀갓길 2,875곳에 설치된 비상벨은 총 5,404개다. 귀갓길당 평균 거리를 300m로 가정할 때 160m당 1개꼴에 불과하다. 대흥동 주민 조모(30)씨는 “비상벨까지 가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그 전에 제압당할 것 같다”며 불안해했다. 비상벨이 설치되지 않은 곳도 1,221개소에 달한다.

5일 마포구 고산18길에 설치된 비상벨이 인근 공사 안내판에 의해 한쪽 방향이 가려져 있다.
동대문구 고산자로30길 만남지하차도 중앙 기둥에 비상벨(윗사진 노란색 원 안과 아래 사진)이 설치돼 있다.
강북구 노해로8가길에 설치된 비상벨은 불법 주차된 차량 때문에 접근하기 어렵다.
고산자로30길에 부착된 특별 방범 지역 표지가 심하게 낡아 있다.
#3 CCTV 없는 곳도

설치 자체만으로 잠재적 범죄 예방의 효과가 있는 CCTV는 으슥한 곳보다 교차로 등 유동인구가 많은 위치에 주로 설치돼 있었다. 감사원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여성안심귀갓길에 설치된 CCTV는 총 1만1,412대로 76m 당 1대꼴이고, 152곳은 CCTV가 아예 없다. CCTV와 비상벨 모두 설치되지 않은 경우도 114곳이나 됐다.

#4 존재감 없는 여성안심귀갓길

‘여성안심귀갓길’을 홍보하는 노면 표시나 안내 표지조차 없는 경우도 2,167곳, 전체의 75.4%에 달한다. 특별한 방범 구역이라는 표시는 여성의 이용률을 높이는 것은 물론 범죄 예방 효과도 있다. 그러나 현실이 이렇다 보니 주민들마저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동대문구 답십리동에 사는 문수현(24)씨는 “1년 정도 살았는데 전혀 몰랐다. 어린이 보호구역처럼 눈에 잘 띄는 색깔로 크고 확실하게 표시해 주면 범죄 예방효과도 생길 것 같다”고 말했다.

#5 집중 순찰 구역이라는데…

도보 순찰 등 ‘세밀한 순찰’은 여성안심귀갓길 관련 정책에도 명시돼 있으나 주민들은 거의 체감하지 못했다. 취재 과정에서도 순찰차나 경찰관은 볼 수 없었다. 대흥동 주민 안종미(56)씨는 “인근 재개발 공사로 동네가 한적해져서 더 무섭다. 도보 순찰을 한 바퀴씩 돌아주면 좋겠는데 순찰차가 대로변에 잠깐 서 있다 가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지구대별로 업무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상황에 맞게 순찰하고 있다”며 “여성안심귀갓길은 집중 순찰 구역으로는 지정이 돼 있다”고 밝혔다.

상가와 유동인구가 많은 강북구 노해로8가길 교차로에 CCTV가 설치돼 있다.
강북구 도봉로83길에 이 지역이 순찰 구역임을 알리는 표지가 부착돼 있다.

여성안심귀갓길은 방범 시설 설치 비용을 지자체에 의존하기 때문에 지역별 편차가 크고 관리, 운영상의 문제도 적지 않다. 그러나 최근 주거 침입, 강간 미수 등 여성 대상 범죄가 잇따르며 불안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범죄자의 의지를 위축시키는 한편, 범죄에 대한 여성의 공포심을 줄이고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옵션을 늘리는 차원에서 여성안심귀갓길은 좋은 방향”이라면서 “단, 이 같은 효과를 누리기 위해선 홍보와 유지 관리가 제대로 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경찰청은 지난 5월 실시한 여성안심귀갓길 점검을 통해 환경개선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난 947곳에 CCTV와 비상벨 등 방범시설을 보강할 계획이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정예진 인턴기자

여성안심귀갓길 노면 표시가 그려진 강북구 한천로143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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