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2막!] 50년 지나 다시 만난 詩… 노년의 시간도 ‘꽃봉오리’임을 깨달아

입력
2019.07.10 04:4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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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 애호가’된 이방주 제이알투자운용 회장 

대기업 임원 출신인 이방주 제이알투자운용 회장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울 남산을 산책하며 시를 암송한다. 그에게 이 시간은 가장 큰 치유의 감정을 선사한다. 이한호 기자
대기업 임원 출신인 이방주 제이알투자운용 회장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울 남산을 산책하며 시를 암송한다. 그에게 이 시간은 가장 큰 치유의 감정을 선사한다. 이한호 기자

세월은 많은 것을 앗아간다. 나이가 들수록 삶을 버텨낼 체력도, 돈도, 시간도 줄어드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세상의 이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퇴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끝 모를 ‘상실감’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선에서 은퇴 이후 뒤늦게 삶의 ‘충만함’을 새롭게 찾는 경우도 있다. 대기업 임원 출신으로 부동산 자산운용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이방주(76) 제이알투자운용 회장은 후자에 속한다. 그에게 제2의 인생을 열어 준 것은 시였다. “시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멘토”라고 말하는 이 회장을 지난달 21일 서울 을지로 사무실에서 만났다.

아마추어 시 애호가를 자처하는 이 회장이지만, 그의 삶은 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26세에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30년 넘게 근무하고 대표이사까지 올랐다. 남들은 은퇴를 준비하던 시기였지만 회사는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현대산업개발로 자리를 옮겨 2009년까지 부회장으로 일했다. 꼬박 40년, 일생을 총성 없는 전쟁터라 불리던 비즈니스 현장에서 앞만 보고 달렸다. 매일 오전 7시30분, 아침 회의를 시작으로 그의 하루는 분단위로 움직였다. 밤에는 야근 아니면 술자리가 이어졌다. 휴일도 맘 놓고 쉴 수 없었다. 이 회장은 “모든 가장들이 그렇듯 세상사와 씨름하느라 일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세월이었다”고 회고했다.

일에만 치여 살던 이 회장에게 시는 불현듯 찾아왔다. 7년 전 어느 봄날, 서울 종로구 혜화초교 인공담장 꽃길을 지나칠 때였다. 팻말에 적힌 글귀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중략)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제목의 시였다. 나란히 쓰여 있던 서정주 시인의 ‘국화옆에서’의 글귀도 눈길을 사로 잡았다. 이 회장은 당시 느꼈던 감정을 ‘시’처럼 표현했다. “한밤중에 무심코 커튼을 열어 젖혔을 때 갑자기 달빛에 쏘인 것 같은 충격이었죠. ‘아, 내가 이렇게 황홀한 세계를 외면하고 살았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더군요.”

이방주 회장이 지난 3월 출간한 ‘시와 함께 걷는 마음’이란 에세이집을 훑어보고 있다. 배우한 기자
이방주 회장이 지난 3월 출간한 ‘시와 함께 걷는 마음’이란 에세이집을 훑어보고 있다. 배우한 기자

사실 시는 이 회장의 마음속에 늘 자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학창시절에도 시를 좋아했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너무 대단해 보여 꿈도 못 꿨지만, 시와 문학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친한 친구들과 한국문학ㆍ세계문학전집을 싸 들고 경남 합천 해인사 암자에 들어가 한 달 동안 독서모임을 가진 적도 있다. “주변에선 다들 고시 공부를 하는데 우린 문학 책을 밤새 읽고 토론할 만큼 푹 빠져 있었죠.” 하지만 각박한 일상 속에서 문학과 시를 찬미하던 청년은 저 멀리 사라져 갔다. 회사 일을 시작하면서 책을 보더라도 전문 경영서나 금융 서적에 먼저 손이 갔다. “아무래도 대기업을 나온 뒤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마음이 편안해지니 그간 숨죽여 왔던 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깨어난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날 이후 이 회장은 마음에 드는 좋은 시를 찾아다녔다. 서점에 나온 시집을 챙겨 보는 것도 모자라 중ㆍ고등학교 교과서도 새로 사 봤다. 그러곤 수많은 시 중에서 ‘이방주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의 취향은 확고했다. 너무 길거나 지나치게 산문적인 시보다는 운율과 음악적 리듬을 가진 시를 선택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시에 대해 어렵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회장은 좋은 시를 선택하면 손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시를 즐기는 방법으로 암송을 추천했다.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면 일단 외운다. 그러곤 홀로 조용히 걸으면서 낭독하며 시의 맛을 음미한다. 사무실이나 집에서 가만히 앉아서 읽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혼자 숲길을 걸으며 암송하는 걸 추천한다. 이 회장은 시를 가까이하기 위해 매일 빼놓지 않고 남산 산책로를 3.4㎞씩 걷는다고 했다. “숲길을 걸으며 시를 암송하다 보면 시가 지닌 품격과 기(氣)가 마음속에 스며드는 느낌을 받을 수 있죠.” 그는 시를 암송하며 산책하는 시간이 “최상의 힐링”이라고 했다. 매일 일정한 걷기 운동을 통해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덤이다.

시에 대한 단상을 적어 내려가는 것도 시와 친해지는 방법 중 하나다. 이 회장은 시를 읽으며 느낀 여러 생각과 경험을 녹여 지난 3월 ‘시와 함께 걷는 마음’(북레시피)이란 책도 냈다. 책에는 일흔 평생의 삶에서 끌어 올린 지혜와 통찰이 곳곳에 녹아 있다. ‘텅 비운/마음이 가벼워져/새처럼 높이 날아 멀리 보며/세상에 부러운 게 없고/누구를 시기하거나/보기 싫거나/미운 사람이 없는 사람/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다’. 김내식 시인의 ‘세상에 가장 부자’라는 시다. 이 회장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 남과 비교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서양 사람들이 타인의 프라이버시에 대해 존중하는 것은 쓸데없이 남과 비교하게 되는 피곤한 상태를 피하려는 사려 깊은 태도”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 회장은 ‘시’라는 멘토를 통해 그간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깨달음을 정리해 나갈 수 있는 게 가장 큰 기쁨이라고 했다.

대기업 임원 출신인 이방주 제이알투자운용 회장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울 남산을 산책하며 시를 암송한다. 그에게 이 시간은 가장 큰 치유의 감정을 선사한다. 이한호 기자
대기업 임원 출신인 이방주 제이알투자운용 회장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울 남산을 산책하며 시를 암송한다. 그에게 이 시간은 가장 큰 치유의 감정을 선사한다. 이한호 기자

하지만 당장 먹고사는 게 걱정인 사람들에게 시는 어쩌면 사치일지 모른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만 누리는 고상한 취미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회장은 이 같은 시각에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 내면에는 저마다 우주의 마음이 들어 있어요. 종교, 예술, 철학이 그 잠재력을 끄집어내 줄 수 있죠. 하지만 으뜸은 시라고 봐요. 두꺼운 경전이나 철학 서적을 읽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죠. 시는 다릅니다. 간결한 형태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 주죠.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일수록 시가 멘토 역할을 해 줄 수 있습니다.”

이 회장이 생각하는 인생 2막은 내면을 가꾸는 시간이다. 노년의 힘은 오랜 세월 세상사와 씨름하며 쌓아 놓은 경륜과 지혜에서 비롯된다. 그 힘은 피부 관리를 하고, 머리를 염색하고, 비싼 옷을 입는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그는 “자신만의 퀄리티 타임(Quality timeㆍ귀중한 시간)을 누려라”고 조언했다. “너무 잘났다고 자만할 일도 아니고, 능력이 없다고 가진 것이 없다고 주눅 들 일도 아니에요. 다 나름대로 조절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디자인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퀄리티 타임을 많이 갖도록 노력하는 게 물리적으로 오래 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지만, 사용하기에 따라 누구에게는 길게, 또 누구에게는 짧게도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시는 정현종 시인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다. “우리가 사는 일생은 눈 깜짝하는 축복의 시간이죠. 하지만 희로애락 속에 갇혀 살다 보면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인 것을 인식하고 살기가 쉽지 않아요.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은,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란 시구를 경전이나 염불 외우듯 수시로 암송하며 주문을 외우는 거죠. 그러면 현실적인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모든 순간이 다아/꽃봉오리인 것을/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꽃봉오리인 것을!” 가만히 눈을 감고 시를 읊조리는 이 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의 인생 꽃봉오리는 아직 시들지 않았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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