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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화고등학생 권리 연합회 제공

한 장의 사진에 가슴이 울컥해졌다. 아이들이 손팻말을 들고 파업하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응원하는 사진이었다. 신선한 장면이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더 낫다. 대견하고 미안하며 부끄러웠다. 다행히 학교 현장에서 급식, 돌봄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육공무직 노조인 전국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연대회의) 총파업이 사흘로 끝났다. 노동의 강도는 더 센데 급여는 더 낮고 조건은 열악한 게 비정규직 노동이다.

파업은 일단 불편과 불이익을 초래한다. 버스와 지하철이 파업하면 당장 출퇴근 등하교가 고역이다. 그러니 일단 파업하는 사람들을 욕한다. 왜 그들이 파업하는지, 그들의 요구조건이 무엇인지, 그래야만 한 과정이나 절차는 어땠는지 등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일단 비판부터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파업하는 사람들의 급여가 높은 편이라면 그 비판과 욕설은 더 거칠어진다. 급여가 조금 높다고 파업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조항은 없다. 우리는 의무에 대해서 과하게 가르쳤다. 정작 권리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친 적도 없다. 노동의 권리조차 그저 노동3권 운운하는 조항을 외고 지날 뿐이다. 심심해서 파업하는 것 아니다. 절박해서, 다른 절차 다 해봐도 자신들의 권리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학교 급식이 멈추면 당장 학부모들 입장에서 불편하다. 아이들 굶길 수는 없으니 다른 대체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불편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신문에서도 그런 점을 부각시킨다. 특히 수구언론의 제목은 가관이다. 파업 ‘대란’ 혹은 학생 ‘볼모’ 급식대란 운운하며 그것 때문에 불편할 시민들을 선동한다. 정작 왜 파업해야 하는지, 근로조건과 상황은 어떤 것인지 따위는 외면한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파업에서 수구언론이 보이는 태도와 방식은 대동소이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급식파업의 상황에서 당사자인 학생들이 급식노동 비정규직을 응원하고 자신들의 불편은 감수할 수 있다고 의연하게 행동한다. 우리는 바로 이 상황을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그런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쳤을까? 그런 교사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야 지지하지만 학생들에게 그런 내색하기는 어려운 게 우리 교육현실의 울타리다. 그렇다면 왜 학생들은 파업노동자를, 그것도 당장 자신들이 불편한 상황에서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일까?

정규직 일자리 얻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세상이다. 오죽하면 아이들의 꿈이 ‘정규직’일까. 학교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많다. 따로 명찰을 달고 있지 않을 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학생들도 그걸 안다. 그리고 자신들의 미래의 삶도 어쩌면 그런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바로 그런 유대와 공감이 그들로 하여금 약자인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응원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학생들이 그런 연대와 공감을 드러내는 건 고맙지만 그 동기와 현실을 두려워해야 한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조작된 이미지와 해석에 휘둘리지 말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그 고통의 원인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게 올바른 공감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말로는 공감을 떠들지만 언제나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볼’ 뿐 나의 고통으로 내재화하지 않으면 그것은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손택은 연민의 한계와 양심의 명령까지 진실하게 생각해보라고 요구한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아파할 수 있는 통각을 날카롭게 벼려야 올바른 세상, 올바른 삶을 누릴 수 있다.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삶이 구획되고 한 번 그 올무에 갇히면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사회는 비참하고 끔찍하다. 그걸 조금이라도 허물로 개선해야 하는 건 우리 모두의 책무다.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면 불합리한 여건 속에서 부당한 처우를 받으며 일하도록 강요되는 세상에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범죄행위다. 이번 파업에서 그걸 학생들은 먼저 스스로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파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응원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파업은 좋은 역할을 한 셈이다. 그 이상의 진짜 교육이 어디 있는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밥 먹듯 하는 파업에서 시민들이 짜증내고 욕하는 일이 흔치 않은 건 그게 남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며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지지하고 고통을 감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게 성숙한 시민의식이다. 파업 소식에 욕부터 하고 짜증내며 언론의 선동적이고 편파적인 제목에 휩쓸리지 말 일이다. 아이들에게 부끄럽다. 학생 ‘볼모’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학부모, 불편하지만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현실을 알고 나니 꼭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학생의 말이 과연 불순한 세뇌를 받았기 때문일까? 어른들보다 학생들이 낫다.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 공감이 먼저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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