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C] 교육열이 높은 게 아니라 입시열이 높을 뿐

입력
2019.07.03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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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달 20일 서울 22개 자율형사립고 학부모들이 서울 중구 정동에서 서울시교육청 앞까지 행진을 한 뒤 항의 집회를 갖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0일 서울 22개 자율형사립고 학부모들이 서울 중구 정동에서 서울시교육청 앞까지 행진을 한 뒤 항의 집회를 갖고 있다. 연합뉴스

예전 교육부를 출입하던 시절, 유명 공과대학 간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겪은 큰 좌절로 “고등학교 입시 실패”를 꼽았을 때 무척 놀랐다. 과거 경기고를 꼭대기로 하는 비평준화 시절 고교를 다닌 그는 엘리트 코스를 달려온 인생에서 원하는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 자신을 (한때 나마) ‘실패자’로 여겼던 것 같다. 몇 년 전 한 보수신문에서 서울대에 진학한 학생을 심층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학생도 비슷했다. 인터뷰 요지는 원하는 외국어고 입시에 떨어져서 엄청난 좌절과 괴로움을 겪었고 그 좌절을 극복하고 일반고에서 서울대 입성에 성공한 ‘비결’을 전하는 것이었다.

운이 좋게 평준화 시대에 고교를 다닌 나는 그 좌절을 그다지 공감할 수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면전에서 웃었던 건 아니다). ‘좌절’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게 맞나 하는 의문과 함께. 아마 지금 고교생들이 중학교 입시에 실패해서 인생의 좌절을 겪었다는 초등학생 때의 경험담을 듣는 것과 비슷한 기분일 것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평준화 시절이라 해도, 매달 치르는 시험에서 등수가 한 두 개만 떨어져도 존재를 부정 당하는 것 같던 그 패배감을. 고교 종류별로 촘촘히 서열화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금의 청소년들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편이었을 텐데도, 과거의 그 좌절들이 참 쓸모 없고 소모적이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최근 공개된 전국단위 자사고인 전주 상산고 졸업생의 증언은 ‘무엇을 위해 좌절하고 상처받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오로지 의대 진학을 목표로 모인 획일화된 학생들의 공간 상산고에서는 다양성은커녕 학벌주의와 대입에 찌든 경쟁적 사고만이 가득했습니다.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경쟁과 대입 압박에 상처받고 패배감을 느끼는 것은 대다수 학생들에게 일상이었습니다. (중략) 상산고 졸업생들의 대다수는 재수합니다. 삼수합니다. 사수도 합니다. 의대 가려고요. 얼마 전에 삼수를 해서 소위 스카이 대학교에 들어간 제 친구는 반수한다고 합니다. 의대가야 하니까. 끊임없이 학교 내 인정 투쟁의 일환이었던 의대에 입학하기 위해서 의대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를 착취합니다. 그게 다 상산고라는 공간 내에서 만들어진 패배감과 경쟁의식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의대에 가려는 욕망들이 들끓는 이유가 사람을 살리는 고귀한 일을 하고 싶어서라면 얼마나 기특할까. 그게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내용이 아닌 형식(타이틀)을 성공과 쟁취, 혹은 좌절의 잣대로 삼는 사회는 지옥과 같고, 평균적인 직업의식도 죽기 마련이다. 어느 고교, 어느 대학, 얼마만큼의 연봉, 얼마나 비싼 주택에 사는 지로 끊임 없이 비교하고 좌절하느라 정말 돌봐야 할 가치들, 키워야 할 실력들은 뒷전으로 밀린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회 꼭대기에 위치하고 싶어서 의대에 가려 하고, 내가 사는 지역과 국가에 봉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철밥통이어서 공무원이 되려 하고, 좋은 기사를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자를 권력자로 보고 기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결과가 어떠한지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직ㆍ간접 경험을 해봤으리라.

한 교육전문가가 “우리나라는 교육열이 높은 게 아니다. 그저 입시열이 높은 것뿐”이라고 했다. 유엔 조사에서 한국 성인의 1인당 독서량은 무려 세계 166위로 나왔다고 한다. 25세 이상, 65세 미만의 평생교육 참여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8개국 조사에서 12위에 그쳤고, 직장인의 직무관련 평생교육 참여율은 OECD 평균(19.1%)의 절반수준(10.5%)이다. 타이틀을 따고 피라미드 위치가 정해지면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건가. 교육열이 아니라 입시열만 들끓는 곳,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른 인사들의 막말ㆍ추태ㆍ범죄는 ‘교육’이 없는 사회의 당연한 결과이다.

이진희 기획취재부 차장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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