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8> 철도 삼국지

※ 인사할 때마다 상대를 축복(슬라맛)하는 나라 인도네시아. 2019년 3월 국내 일간지로는 처음 자카르타에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는 격주 목요일마다 다채로운 민족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의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를 선사합니다.

자카르타 첫 경전철 무료 시승 행사에 참여한 자카르타 시민들 표정.

아이들이 줄지어 섰다. 잔뜩 움츠렸다가 자동 개표구 양쪽 칸막이가 열리면 금세 닫힐 새라 폴짝 뛰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을 휴대폰에 담느라 건너편에 늘어섰다. 산뜻한 벽면을 배경으로 가족 기념 사진도 찍었다. 10분 남짓 놀이기구를 만끽한 뒤 여흥에 취한 놀이동산 풍경과 닮았다.

“흥미롭다.”(중학생 윌리엄(14)군) “새로운 경험이다.”(아드리아니(18)씨) “자랑스럽다.”(대학생 나빌라(19)씨) 저마다의 소감과 찬사는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달뜬 낯빛이면 족하다. 두 아이와 함께 무리에 섞여있던 토니아(32)씨가 “한국에서 타 본 거랑 똑같아서 마음에 든다”고 정곡을 찔렀다. 그렇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 사상 처음으로 한국 철로가 깔렸고, 그 철길 위를 한국 열차가 달린다.

지난달 16일부터 무료 시승 행사가 진행 중인 자카르타의 첫 경전철 역사에서 아이들이 자동 개표구 앞에 줄지어 서서 양쪽 칸막이가 열리면 금세 닫힐 새라 쏜살같이 뛰고 있다.

지난달 16~21일 자카르타에 10만명을 움직인 이벤트가 열렸다. 개통을 앞둔 자카르타 북부 지역의 경전철(LRT) 1단계 구간(5.8㎞)의 선착순 무료 시승 행사였다. 기자는 지난달 20일치 탑승 티켓을 구했다. 열차 안과 역사는 가족 친구 연인들이 관광이나 나들이를 즐기러 온 분위기였다. 열차는 소음이나 진동을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쾌적했다. 석 달 전 인도네시아의 첫 지하철 도심고속철도(MRT)를 시승했을 때(본보 3월 21일 19면)보다 흥겹고 아기자기했다.

새로운 교통수단을 열망하는 ‘교통 지옥’ 시민들의 바람은 행사가 진행될수록 커졌다. LRT 운영업체는 언론 설명회까지 열어 “날마다 승객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관련 도표를 곁들여 밝힌 뒤 무료 시승 기간을 제한 없이 무기한 연장했다. ‘누구든 데려와도 환영한다’는 표어와 함께.

지난달 16일부터 무료 시승 행사가 진행 중인 자카르타의 첫 경전철 역사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LRT는 MRT와 더불어 자카르타 교통의 미래를 이끌 쌍두 철마다. 무엇보다 LRT는 한국 일본 중국 동북아 3개국이 인도네시아에서 펼치는 철도 삼국지의 정세를 상징한다. 일본의 아성을 중국이 공략하는 사이 한국은 작지만 뜻 깊은 실리를 착실하게 챙기는 형국이다.

30여년 전 철도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인도네시아에 먼저 깃발을 꽂은 건 일본이다. 1985년 MRT 건설 계획을 마련했으나 인도네시아 국가 사업에 반영되지 않았다. 지구전에 들어간 일본이 실제 MRT 1단계 구간(15.7㎞) 공사를 시작한 건 28년이 지난 2013년이다. 잦은 공사 지연과 “지진에 취약하다” “비싸다” 등 온갖 비난에 시달린 끝에 올 3월 무료 시승 행사를 거쳐 4월 정식 개통했다.

현재 운행 중인 인도네시아의 첫 지하철인 자카르타 MRT 열차. 닛폰열차제조㈜가 제작했다.

현재 MRT는 당초 우려와 달리 순항 중이다. 역 주변 상권이 살아나면서 자카르타에 ‘역세권’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다. 지하철을 타 본 적 없는 지방 사람들에겐 신기한 관광 명소다. 연계 교통수단이 부족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남쪽 종착역에 연계용 공영 주차장을 지을 예정이다. 일본의 성취는 인도네시아 역사의 ‘첫 지하철 개통’ 페이지를 장식했다.

2008년 일본은 ‘인도네시아 첫 고속철도 수주’ 야심마저 품었다. 타당성을 검토한 뒤 인도네시아 정부와 자금 조달 계획을 놓고 10년 가까이 줄다리기했다. 이번엔 일본의 지구전이 먹히지 않았다. 기회를 엿보던 복병 중국이 2016년 파격적인 자금 조달 방안을 무기 삼아 ‘자카르타-반둥 142.3㎞ 구간 고속철도’ 사업을 일본으로부터 사실상 ‘강탈’한 것이다. 일본이 인도네시아 정부에 거세게 항의했지만 ‘돈 폭탄’의 위력 앞에 무너졌다. 그렇게 ‘인도네시아 첫 고속철도’에 중국 이름을 올렸다.

인도네시아 고속철도 공사가 잘 풀리지 않자 중국이 홍보에 나선 고속열차 ‘CR400AF’. 인터넷 캡처

착공 3년이 지났지만 공사는 지지부진하다. 자카르타에서 반둥으로 향하는 1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아직 기둥조차 박지 못한 곳이 허다하다. 지난해 말 기준 공정률이 8%에 불과하다. 토지 정비 역시 100% 완료하지 못한 상태(현재 93%)다. 중국에서 값싼 노동자들을 직접 데려다 쓰는 방식도 불법 체류 등 잡음을 일으키고 있다. 올해 말까지 공정율을 60%까지 끌어올려 2021년 완공한다는 계획이지만 MRT와 LRT의 공사 지연 전례를 감안하면 장담하긴 이르다. 현지인들 사이에서 “언제 될 지 모르겠고, 개통해도 (중국이 만든 거라) 위험해서 안 탈 것”이란 얘기들이 나돌 정도다.

철로라는 전방이 막히자 중국은 아직 운행이 한참 남은 고속열차를 후방에서 한껏 띄우는 모양새다. 중국산 최신 모델 ‘CR400AF’ 고속열차를 투입하겠다고 최근 홍보에 나선 것. 최고 시속 420㎞, 통상 시속 350㎞로 달리는 CR400AF를 타면 자카르타에서 반둥까지 35분(중간 역들 경유 시 45분)이면 닿는다고 한다. 현재 일반 열차는 3시간 25분, 자동차는 평균 4~5시간이 걸린다. 여기에 △열대기후에 적합한 설계 △낙뢰 방지 장치 두 개 장착 △실내 소음 최소화 △30년 이상 사용 가능 등을 내세우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본 자카르타의 첫 경전철 역사와 열차. 열차는 현대로템이 만들었다. 한국철도시설공단 제공

우리나라는 2016년 자카르타 도심 LRT 1단계 공사를 따내면서 사실상 중국과 일본이 선점한 인도네시아 철도 전쟁에 출전했다. 정책적이고 정치적인 뒷배를 톡톡히 누린 일본, 중국과 달리 입찰 전쟁에서 중국, 스페인, 캐나다 등을 당당히 물리쳤다. 공사 규모나 액수는 고속철도와 MRT에 비할 바 못되지만 첫 술에 배부르랴, 아니 시작이 반이다. ‘자카르타 첫 LRT’라는 영예를 대한민국에 안겼다. 안정적인 시승 행사 덕에 올해 말 예정된 자카르타 LRT 2단계 사업 수주에 청신호가 커졌고, 다른 지역 서너 개의 LRT 건설에도 참여할 계획이다.

인도네시아 주재 한국 대사관의 배석주 국토관은 “대도시마다 궤도 교통수단을 갖추지 못했고, 국토 면적이 넓은 인도네시아는 그만큼 철도 시장의 전망이 밝다”라면서 “일본은 기술력, 중국은 자금력이 앞선다면 우리는 그 두 가지 역량을 키워가며 속도로 승부하면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지금 분위기가 좋다, 하나만 더 따내면 치고 나갈 수 있다, 이제 뛰어야 할 때”라며 “정책 금융 등 자본 조달 능력 보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16일부터 무료 시승 행사를 하고 있는 자카르타의 첫 경전철에 승객들이 탑승하고 있다.

자카르타ㆍ반둥=글ㆍ사진 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web_cdn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