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천원청 죽음의 진실(7.3)

입력
2019.07.03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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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통치 시기 타이완 민주화 운동가인 수학자 천원청(왼쪽)이 1981년 7월 3일 숨진 채 발견됐고, 죽음의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tahistory.org
계엄통치 시기 타이완 민주화 운동가인 수학자 천원청(왼쪽)이 1981년 7월 3일 숨진 채 발견됐고, 죽음의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tahistory.org

지난해 5월 타이완 차이잉원(蔡英文) 민진당 정부는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체제하의 백색테러에 희생된 1,270명의 첫 사면ㆍ복권을 단행했다. 대부분 숨진 이들이지만 그로써 명예의 일부가 회복됐고, 공식적인 국가 보상의 길이 열린 셈이다. 물론 희생자는 훨씬 많다. 장제스 치하(1949~1975) 약 14만명이 군사법정에 회부됐고, 8,000여명이 처형됐다. 사법 테러 바깥의 희생자도 많을 것이다. 권력을 승계한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1987년 계엄령을 해제하기까지 시민 탄압은 지속됐다. 한국처럼 타이완도 들추어 밝혀야 할 역사의 추한 거적이 두껍다.

미국서 활동한 타이완 수학자 천원청(陳文成, 1950~1981)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1981년 7월 3일, 장징궈 집권기다. 그는 국립타이완대를 졸업하고 75년 미국 미시간대로 유학, 지도교수인 통계학자 브루스 힐로부터 “교수로 일한 21년 동안 이렇게 뛰어난 제자는 만나지 못했다”는 평을 들으며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곧장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의 카네기 멜런대학의 조교수가 된 주목받는 학자였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타이완 민주화를 위해 학보 등에 영문으로 글을 기고했고, 고국의 민주화 단체 등을 직ㆍ간접으로 도왔다. 그는 미국 현지에서도 대만 비밀경찰의 사찰을 당한 블랙리스트 인사였다.

그는 대학 재임 만 3년 만인 1981년 5월, 방학을 맞아 아내, 아들과 함께 고국을 방문했다. 휴가를 마친 그는 타이완 군부인 경비총부(警備總部)의 비밀 공안에 의해 출국을 금지 당했고, 7월 2일 심문을 받기 위해 연행됐다가 다음 날 새벽 타이완대 도서관 앞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공안당국은 그가 반국가 범죄 사실이 들통난 게 수치스러워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구체적 범죄 혐의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당시 그는 1979년 말의 ‘메이리다오(美麗島) 사건’ 즉 남부 가오슝에서 야당 민진당과 관련된 잡지 ‘메이리다오’ 주최의 민주화 시위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정권이 바뀐 뒤 진실 규명을 위한 공식 시도가 여러 차례 이어졌지만, 증거 멸실 등을 이유로 제대로 이뤄진 적은 없다. 2009년 원본 심문조서가 발견돼 다시 재조사가 시작됐지만, 검찰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당시 공안의 책임을 묻는 데 실패했다. 그의 추모 광장이 마련된 타이완대에서는 기일마다 조촐한 집회가 열린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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