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重讀古典] 무(武)와 문(文)

입력
2019.07.02 04:40
29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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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지(武備志)’라는 책이 있다. 명나라 모원의(茅元儀, 1594~1630)가 만든 군사학 백과전서이다. 240권 200여만자의 대작으로 1621년에 출판되었다. 병결평(兵訣評), 전략고(戰略考), 진련제(陣練制), 군자승(軍資乘), 점도재(占度載)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병법부터 전시 의료체계까지 한마디로 전쟁과 관련한 모든 것이 총망라된 명저이다.

군사학을 옛날에는 병학(兵學)이라고 했다. 모원의는 2,000여종의 병학자료를 검토하고 15년에 걸쳐 ‘무비지’를 완성했다고 한다. 지금은 못 보게 된 자료도 많은데, ‘조선세법(朝鮮勢法)’이라는 우리에게 없어진 검법까지 실려 있을 정도이다. 아버지 모곤(茅坤)이 세상에서 알아주던 장서가(藏書家)였기에 집안 덕을 본 것도 있다.

당시 후금(後金)과 전쟁 중인 명나라의 입장에서 썼기 때문에, 청나라 건륭제 시기에는 금서가 되기도 하였다. 청나라는 여진족, 즉 만주족을 비하했거나 국방에 민감한 내용은 삭제 혹은 수정하여 다시 출판하였다.

조선은 영조 13년(1737년) 연행을 통해 구입하고 이듬해 평양에서 50부를 간행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해(1777)에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구입했는데 여기에도 ‘무비지’의 내용이 실려 있다. 수천 장의 지도와 도해가 첨부되어 있어서 수원 화성을 쌓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무비지’의 원래 모습을 보려면 1989년 출판된 ‘중국병서집성(中國兵書集成)’에 실린 판본을 보는 것이 좋다.

모원의는 명나라가 문약(文弱)에 빠져 군사력 강화를 소홀히 했기에 수모를 겪게 되었다고 판단한다. 집권층인 사대부가 병학(兵學)을 천시하므로 전쟁이 나면 허둥대며 속수무책이라고 개탄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나라의 군사력이 느슨해지면 문화도 보전할 수 없다(自武備弛而文事遂不可保)’이다. 그의 충정과 울분에도 불구하고 주지하듯 명나라 백성들은 결국 만주족의 옷을 입고 변발을 하게 된다. 명나라 곁에 있던 조선도 역시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았다.

일반적으로 유학(儒學)은 병학을 천시한다고 오해도 하지만, 원래 유학의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무비(武備)’라는 말도 유가 경전인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서 나왔다.

BC 500년, 제나라 경공과 노나라 정공이 협곡에서 회담했다. 이때 공자가 정공을 보좌했다. 양국의 임금이 단상에 올라가 맞절을 했다. 이때 제나라 사람들이 북을 치며 일어나서 정공을 체포하려 했다. 원래 경공은 회담이 목적이 아니었다. 노나라를 압박하거나 잘되면 정공을 납치하려는 속셈이었다. 공자는 재빨리 계단을 올라가 제나라 임금을 보며 말했다. ‘두 나라의 임금께서 화평을 맺는데 왜 오랑캐들이 온 것입니까?’ 제나라는 사달을 낸 뒤에 지역 원주민들의 소요라고 둘러댈 속셈이었다. 제나라 경공이 머뭇거리다가 사과했다.

회담을 마친 뒤, 제나라가 다시 장난을 쳤다. 광대에게 노나라 임금의 장막 아래서 춤을 추게 한 것이다. 공자가 ‘임금을 조롱했으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말하고, 무장에게 명령하여 광대를 죽이고 머리와 발을 문밖에 내다 버렸다. 제나라 경공은 귀국 후에 노나라에게 빼앗은 땅을 돌려주었다. 회담을 통해 노나라를 만만히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곡량전’은 이렇게 매듭을 진다. ‘이번 일로 알 수 있듯이, 친선을 위한 회담에도 반드시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必有武備).’ 협곡의 회담에서 공자가 보여준 모습은 그저 매너 좋은 군자도, 붓만 잡고 쩔쩔매는 나약한 선비도 아니다.

왜란과 호란을 겪고도 국방을 소홀히 하는 태도를 걱정하는 사람이 조선에도 있었다. 이정집(1741~1782)과 이적(?~1809)이 그런 분들이었다. 두 사람은 부자 관계로, 아버지의 유고(遺稿)를 아들이 정리하여 펴낸 책이 ‘무신수지(武臣須知)’라는 책이다. 1809년에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재(將才), 경권(經權), 진법(陣法)을 줄기로 삼아 구성되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무관 출신으로 큰 벼슬을 한 분들은 아니다. 그러나 구구절절 나라를 걱정하는 내용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병법에 대한 정밀한 해설도 뛰어나지만 조목마다 설명을 읽다보면 수신서로도 손색이 없어 자주 들쳐보게 된다. 그 안에 이런 내용이 있다.

‘조선은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변경이 편안하고 봉화대가 필요 없을 지경이 되었으니 무사들을 쓸 데가 없다. 이렇게 되니 병학(兵學)을 강조하는 내 말은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한 말로 들릴 것이다… 그러므로 약간 흉년만 들어도 백성들에게 폐해가 된다는 명분에 구애되어 군사 문제를 거론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지낸 것이 오래 되었으니, 이는 질병을 발견하고도 치료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해이해진 국방 정책을 어찌할 것인가.’

‘무신수지’가 나오고 불과 100년 후,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나라를 지키는 무(武)가 없으면 그 나라의 문(文)도 사라진다. 때로는 붓으로 할 일도 있고, 칼을 들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박성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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