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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냐방가 와이나이나(1971~2019) 
 
 ※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합니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에게 주목합니다. ‘가만한’은 ‘움직임 따위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뜻입니다. ‘가만한 당신’은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비냐방가 와이나이나는 몇 편의 에세이로 깊은 인상을 남긴 케냐 소설가다. 그는 아프리카(인)에 대한 비아프리카인들의 게으른 편견, 특히 글과 이미지로 무한 반복하는 작가들의 낡고 뻔한 상징과 비유를 경멸했다. 그는 역시 에세이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 동성애자에 관한 이해가 아주 더디고 그래서 가혹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인들에게 동성애(자)의 진실을 알리고 소수자에게 용기와 긍지를 전하고자 했다. 2009년 브루클린 북페스티벌에 참가한 그. Wikipedia.org

비냐방가 와이나이나(Binyavanga Wainaina)는 아프리카 케냐 소설가다. 책으로 묶지 않은 몇 개의 단편과 2011년 출간한 자전소설 한 권이 그가 낸 작품 전부지만, 그는 2002년 부커 재단이 영어로 쓰인 아프리카 작가의 작품에 주는 ‘케인 상(Caine Prize)’을 받은, 영미 문학계의 주목받는 아프리카 작가였다. 하지만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데는 에세이 덕이 컸다. 대표적인 게, 그를 소개하는 거의 모든 글들이 지면을 아끼지 않고 한껏 인용하곤 하는 ‘아프리카에 대해 쓰는 법(How to Write About Africa)’이란 제목의 2005년 에세이다.

영국 문학 계간지 ‘그란타 Granta’에 기고한 A4 용지 세 쪽 분량의 그 에세이는 주로 백인이었을 비 아프리카인의 글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에 대한 오랜 편견과 짜증스러우리만치 진부한 상징과 표현들에 대한, 반어(反語)로 일관한 분노와 비아냥의 글이었다.

“당신 책 표지나 속지 어디에도 잘 차려 입은 아프리카인의 사진은, 혹시 그가 노벨상쯤이나 받은 사람이 아닌 한, 절대로 쓰지 마라. 대신 AK-47 소총이나 툭 불거진 갈비뼈, 벌거벗은 젖가슴 사진이면 된다. 굳이 아프리카 사람을 등장시키려면, 전통복장을 갖춰 입은 마사이나 줄루 혹은 도곤족(서아프리카 고원 소수민족)이 적당하다. 아프리카는 54개국 9억명이 사는 거대한 대륙이지만, 하나의 나라처럼 묘사해도 무방하다. 마른 풀들이 굴러 다니는 덥고 먼지 날리는 땅, 거대한 동물 떼, 깡마르고 껑충한 사람들, 아니면 원숭이고기를 먹는 난쟁이 같은 사람들…. (어떻게 쓰든)거기 사람들은 다들 굶주리고 죽고 전쟁하고 이민 다니느라 바빠 당신 책을 들춰볼 겨를도 없을 것이다.”

그란타의 1994년 아프리카 특집을 읽고, 거기 실린 27쪽 분량의 글들이 절여놓은 아프리카의 이미지와 폭력적인 일반화에 화가 난 나머지 앉은 자리에서 그 모든 글들의 공통점을 분석한, 실은 조롱한, 장문의 메일을 잡지 편집장에게 보냈고, 편집장이 메일의 요지대로 새로운 글을 그에게 청탁했고, 그가 메일 글을 줄이고 손봐 다시 보낸 원고가 그 에세이였다. 그는 에세이를 이렇게 맺었다. “당신 책 끄트머리는 반드시 넬슨 만델라와 함께 아프리카의 무지개나 르네상스의 이야기로 맺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가장 신경 쓰는 문제가 바로 그거니까.(Because you care.)”

그 글은 여행기든 뭐든 아프리카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 아마도 거의 모두를 낯뜨겁게 했거나 움찔하게 했을 것이다. 그란타 현 편집장(Sigrid Rausing)은 그의 저 에세이를 1979년 9월 제1호를 낸 이래 잡지에 실린 모든 글 가운데 가장 널리, 오래 읽힌 글일 것이라고 말했다.(granta.com)

와이나이나는 30대 중반에야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경험적으로 깨우친, 무척 늦된 게이였다. 그의 조국 케냐를 비롯해 우간다, 나이지리아 등 여러 나라가 법까지 고쳐가며 경쟁적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 강도를 높여가던 2014년 1월, 그는 자신이 2003년 창간해 아프리카의 대표적 문예지로 키운 잡지‘콰니?(Kwani?)’에 또 한 편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I Am A Homosexual, Mum’이란 제목의, 짧고 뭉클한 그 커밍아웃의 글로 그는 “사하라 이남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가 됐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 실은 거의 없기도 하다. 그 에세이로 그는 그 해 Time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했고, 친구인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 치마만다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 1977~)는 “비냐방가는 동성애가 인간적인 일임을 알게 했고(demystified and humanized), 동성애자가 ‘얼굴 없는 타자’가 아니라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실체적 존재임을 비로소 알게 했다”고 썼다.

그는 작가란 어떤 얽매임도 없이 자유롭고 진솔하게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지만,그의 세계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 창작과 투쟁의 최소한의 경계를 좀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탓인지 그는 자기 작품은 많이 못 썼지만, 다른 젊은 작가들이 걸을 수 있는 자유로운 길을 터주고자 애썼고, 혐오의 에너지로 차별을 확대재생산하는 케냐의 정치권력과 시민들의 편견에 에세이로 맞섰다.

와이나이나는 2016년 12월 1일 ‘세계 AIDS의 날’에 “나는 HIV 양성이며, 행복하다”는 짤막한 글을 트위터에 썼고, 지난해 5월에는 애인에게 청혼해 승낙받은 사실과 함께 “내년 초 결혼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역시 트위터로 알렸다. 그가 5월 21일, 알려지지 않은 사인으로 별세했다. 향년 48세.

그는 본명인 ‘케네스(Kenneth)’보다 부족의 중간 이름 '비냐방가'를 좋아했고, 그리 불리길 원했다. 그는 범아프리카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국제사회의 아프리카(인)에 대한 태도가 무척 무례하다고 여겼고, 예의는 편견을 벗는 데서 시작된다고 여겼다. 왼쪽은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 치마만다 아디치에. 아디치에 인스타그램 사진.

비냐방가 와이나이나는 1971년 1월 18일 케냐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Great Rift Valley) 주 나쿠루(Nakuru)에서 태어났다. 최대부족인 키쿠유족 혈통의 아버지는 한 농업회사의 임원까지 지낸 성공한 샐러리맨이었고, 우간다 출신 어머니는 나쿠루에서 미용실을 운영했다. 경제적으로 꽤 넉넉했던 덕에 와이나이나는 9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유학, 트랜스카이대학(현 Walter Sislulu University)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보단 희곡과 소설을 더 좋아했고, 언어 자체의 마성적 매력에 넋을 잃을 만큼 빠져들곤 했다고 한다. 케냐 공용어인 영어는 교사들이 부는 호루라기 소리처럼 ‘학생들을 줄 세우는 딱딱한 세계의 언어’였지만, 동시에 밤을 새게도 하는 신비로운 소설 세계의 언어이기도 했다. 그는 훗날 자전 소설(‘One Day I Will Write About This Place: A Memoir’)에 “책 안의 영어로 쓰인 낱말들이 내 몸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면, 마치 펼쳐진 부채가 접히듯, 나도, 다르게 배열된 그 말들의 세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썼다.(WP, 2019.5.22)

대학을 중퇴한 그는 케이프타운에서 프리랜스 음식ㆍ여행 칼럼니스트로 생계를 이으며 글쓰기에 몰두했다. 요리에 관심이 많아 아프리카의 음식 레시피를 1,300여 개나 일삼아 수집했고, 식당을 차려볼 생각도 했지만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고 포기한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0년 만인 2001년에야 케냐로 돌아왔고, 남아공 시절 쓴 ‘고향의 발견 Discovering Home’이란 제목의 단편으로 2002년 케인 상을 탔다. 그 해 본심서 경합한 작가 중 한 명이 아디치에였고, 둘은 이내 친구가 됐다. 와이나이나는 케인 상 상금 1만 파운드로 이듬해 문예지 ‘콰니? Kwani?’를 창간했다. 영어식 스와힐리어 방언으로 ‘그래서 뭐? So What?’라는 의미라는 ‘콰니?’는 이름처럼 도전적인 문화ㆍ지식의 전위로서 “사하라 이남의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 잡지”로 자리잡았다.

그가 유학을 시작한 91년은 남아공의 격동기였다. 만델라가 석방(1990.2)된 직후였고, 새 헌법하의 총선 채비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반면에 그가 떠나온 조국 케냐는 78년 집권한 대니얼 모이(Daniel Arap Moi, 1924~)의 부패 독재 속에 안정적으로 질식해 가던 때였다. 2007년 케냐 총선을 앞두고 선거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쓴 에세이에서 와이나이나는 당시 경험을 이렇게 썼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염려했지만 실제로 내가 남아공에서 경험한 건 전혀 딴판이었다. 흑인들은 백인 정부에 대해 백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발언했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남아공 시민들은 모두가 최대한 큰 목소리로 말했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가 나라를 분열시키는 짓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각자가 떠들다 보면 케냐도 이웃 나라 소말리아처럼 분열된다고, 그러니 입 다물고 ‘내 뒤만 따르라’던 모이정권의 세뇌교육과는 딴판이었다.”(bbc.co.uk) 그가 귀국하던 2001년은 모이의 24년 독재권력이 저물고, 새 헌법으로 총선을 치르려던 때였다. 2003년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새롭게 열린 언론 자유의 공간에서 ‘콰니?’는 꽤 큰 역할을 했고, 작가로 이름을 얻은 와이나이나는 뉴욕타임스와 가디언, 내셔널 지오그래픽, 남아공 매체 선데이타임스 등에 열성적으로 글을 기고했고, 뉴욕 유니언칼리지와 매사추세츠의 윌리엄스 칼리지의 레지던시 작가로, 뉴욕 바드(Bard) 대학 아프리카 문학센터(Chinua Achebe Center) 운영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2005년의 그란타 에세이 이후의 이야기도 후속 에세이로 썼다. 그의 글을 읽은 소설가와 NGO 활동가, 뮤지션, 자연보호활동가, 학생, 여행작가 등등 수많은 이들이 자기가 쓴 글을 비평해 달라며 메일로 청해왔다는 이야기. “마치 내가 아프리카의 가상적 경계에 서서 허가증에 고무도장을 찍어주는 흑인 경비병이 된 것 같았다.(…) 그건 거의 성(性)적인 느낌, 즉 전혀 그럴싸하지 않은 자리에서 은밀히 기어 나와 채찍을 휘둘러 달라고 간청하는 이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인님 때려주세요, 오!” 그는 하루아침에 자신이 ‘아프리카적 자의식(conscience of Africa)’의 화신인 양 면죄부를 주게 된 상황을 비아냥대며 “내가 똑똑했다면, 기다렸다가 스마트폰 유료 앱을 만들어 ‘아프리카에 대해 쓰는 법’을 매일 짧게 연재했을 텐데”라고 썼다.

동성애 행위를 불법으로 단죄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정치권력들은 마녀사냥(예컨대 동성애)을 부추겨 부족-종교-이념의 분열 에너지를 잠재우곤 한다. 와이나이나는 선거철이면 동성애 탄압이 더 심해진다고 말했다. 사진은 2019년 5월, 케냐 고등법원이 동성애 행위를 불법으로 재확인하는 판결을 하기 직전 나이로비 인권운동가들의 시위 장면. AP 연합뉴스

앰네스티에 따르면

아프리카 54개국 중 31개국이 동성애 행위를 형법상 범죄로 처벌한다. 우간다에서는 동성애 행위가 최고 사형에 해당되는 중범죄이고, 나이지리아에서도 징역과 별개로 이슬람 율법에 따른 채찍형이나 돌팔매질을 당하는 범죄다. 동성애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인권운동가가 살해당하기도 하고, 옹호 활동 자체가 불법인 곳도 적지 않다. 케냐도 예외가 아니어서 현지인 중 공개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는 없고, 게이 인권운동가들도 적어도 겉으로는 게이가 아니다. 와이나이나가 만 43세 생일에 맞춰 발표한 커밍아웃 에세이는, 여느 서구 유명인사의 그것과는 의미도 파장도 달랐다.

자전 소설에 담지 못한 ‘마지막 챕터’라는 부제를 단 그 에세이는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됐다. 2000년 7월 어머니의 임종 전 병실 머리맡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백하는 가상의 이야기, 여권을 훼손하는 바람에 남아공 출국을 못해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2011년 숨진 아버지에게도 자신이 게이임을 끝내 알리지 못한 실제 이야기, 그리고 유년 시절 어렴풋이 느꼈던 동성애적 끌림과, 한사코 문학으로 도피하려 했던 청년기의 경험. 에세이를 쓸 무렵 AIDS 합병증으로 숨진 한 친구를 외롭게 보낸 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뭐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글이 잡지에 발표된 날 저녁부터 여기저기서 다급한 연락이 왔지만, 그는 최소 48시간 정도는 자기 글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으려 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시간을 갖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짐승과 다를 게 뭐냐”는 식의 비난이 대부분이었지만, “내가 지켜줄 테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며 전화를 건 경찰관 동창생 같은 이들도 없지는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NYT, 2014.1.24)

그는 동성애를 처음 육체적으로 경험한 33세 이전까지는 긴가민가 하면서도 스스로를 게이라 인식하지 못했다고 2014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말했다. 2017년 남아공 위츠대학 강연 직후 좌담에서 그는 “내게 대놓고 ‘너 게이냐’고 처음 물어본 이가 아디치에였다”고 소개했다. “나는 물론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그 직설적인 질문이 내 안의 뭔가를 해방시켰다”고, “그 뒤론 글을 쓸 때마다 나는 그 질문에 거듭 답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johannesburgreviewofbooks.com)

2007년 세계경제포럼(WEF)이 ‘Young Global Leader Award’ 수상자로 그를 선정하자 그가 메일로 사양한 일이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나도, 명성과 부와 세계적인 평판에 대한 환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작가다. 작가로서 내가 지켜야 할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은, 항상 나 자신을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로, 독립적이고 창조적인 존재로 지키는 것이다. 내가 세계 문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된 듯 진부한 생각을 수용하는 건 스스로에게 크게 사기를 치는 일이 될 것이다.”(granta.com)

화도 났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책임감도 느껴 커밍아웃 에세이를 썼다면서도, 그는 자신이 마치 게이의 대변인처럼 여겨질까 봐 걱정했다고도 말했다. 케인 상의 가치가 과대평가되고, 아프리카 작가들이 그 상의 평가에 휘둘리는 것이 못마땅해 2014년 트윗을 통해 공개적으로, 격렬하게 그 상을 성토한 것도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그는 글은 자유롭게 진솔하게 써야 하고, 그런 글(쓰기)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사회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여겼던 듯하다. 그는 늘 홧김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자신의 글을 전략적으로 활용했고, 그 에세이가 세상을 바꾸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바랐다.

가족력인 당뇨와 뇌혈관 질환을 앓던 그는 2015년 두어 차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회복된 뒤로는 지팡이를 짚었고, 말도 약간 어눌해졌다. HIV 감염과 별개로, 그의 몸은 병들어 있었다. 위츠대학 강연을 앞둔 그에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 천재적 재능에 늘 감탄하는 내 친구”라며 뭉클한 헌사를 썼던 아디치에는 인스타그램으로 부고를 전하며 “그리 친절하고, 관대하고, 유머러스하고, 영민하고, 용감하고, 재능 있고, 해박하고, 호기심 많고, 독창적인.”이라고 쓴 뒤 “지금 나는 과거시제를 쓰기 위해, 울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다”고 덧붙였다.

발표한 작품 말고도 써둔 작품이 꽤 있으리라는 풍문은 파다했지만, 유작이 있다는 소식은 없었다. 작가로서 그는 지나치게 깐깐했거나 게을렀다. 대신 그는, 나이지리아 ‘아케 예술ㆍ북페스티벌’ 설립자 겸 작가인 롤라 쇼네인(Lola Shoneyin)의 말처럼, 아프리카 청년 작가들에겐 귀한 멘토이자 본보기였다. 그란타 편집장 시그리드 라우싱은 비냐방가가 보낸, 대부분 휴대폰으로 쓴 ‘이 작가 저 작가를 칭찬하며 그들의 작품 일부를 첨부한’ 수많은 이메일들을 환기하며 “맞다. 그는 늘 도움을 청했고, 내가 그를 돕기는 도왔다. 그런데 과연 제대로 도운 걸까? 모르겠다”고 썼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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