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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영화 '장군의 아들2'. '장군의 아들'은 박상민이라는 걸출한 신인 배우를 탄생시키며 흥행에 성공해 3편까지 만들어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액션영화로 출발한 임권택 감독 
 ‘씨받이’ 등 성공한 거장 입장서 
 제작자의 액션 권유에 불쾌했지만 
 자신의 능력 변했나 궁금해 수락 
 
 #신인배우 오디션에 2000명 몰려 
 연기 미숙에 재촬영 거듭했지만 
 신현준 황정민 등 훗날 스타 등용문 
 6개월 장기흥행… 결국 3편까지 찍어 

소설 ‘장군의 아들’을 ‘물건’으로 눈여겨본 건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이었다. 때마침 미니 시리즈 ‘무풍지대’가 해방 이후 정국을 풍미한 주먹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인기를 끌었고 협객물이 다시 유행을 탈 분위기도 무르익고 있었다. 1984년 태창영화사를 인수해 개명한 이래 임권택 감독과는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까지 쭉 같이 해온 영화적 동지이자 물주였던 이 사장은 ‘장군의 아들’의 영화화를 적극 권유한다. 처음엔 “과거 경험을 살려 쉬어가는 기분으로 가벼운 오락 영화를 연출해달라"던 제의를 임 감독은 굉장히 불쾌한 심정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잡초’(1973)까지 국책영화를 닥치는 대로 찍어온 지난 경력을 반성하며,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과 인본주의에 대한 고민을 담아 ‘짝코’(1980)와 ‘만다라’(1981), ‘길소뜸’(1986)과 ‘씨받이’(1986) 등을 연달아 발표해왔던 감독의 입장에서 김두한 영화란 1970~80년대에 숱하게 쏟아진, ‘다찌마와리’(싸우는 장면을 일컫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충무로 속어로 액션영화를 의미한다)의 한 족속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 시리즈에서 일본 야쿠자 하야시를 연기한 신현준. '장군의 아들' 오디션을 통해 데뷔한 그는 하야시역을 원한 유일한 지원자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장군의 아들' 주연 캐스팅을 위한 오디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다찌마와리 영화 숙련자 

돌이켜보면 액션 장르는 임 감독이 능히 잘 해낼 수 있는 분야이기도 했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으로 유명한 정창화 감독의 문하에서 연출부 스태프와 조감독으로 일했던 임 감독은 데뷔작인 만주 웨스턴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에서 독립군과 일본군간의 총격전을 스키 액션으로 연출한 바 있으며, ‘욕망의 결산’(1964), ‘돌아온 자와 떠나온 자’(1972) 등 ‘다찌와마리’ 영화를 종종 찍어왔던 숙련자였다. 다시 말해 ‘장군의 아들’(1990)은 거장이 오랜 세월 떠나있던 장르 세계로의 복귀였던 셈이었다. “나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태원 사장이 자꾸만 한 번 하자는 거예요. 처음에는 화를 냈다니까. 그런데 자꾸만 마음속 한 구석에서 이걸 해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게 보고 싶어진 거지요.” 해외영화제 수상의 기록과는 별개로 흥행 성적의 부진(단적인 예로 강수연에게 베니스국제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안긴 ‘씨받이’의 관객수는 겨우 1만7,000명이었다)을 겪고 있던 감독은 영화적 경지가 완숙해진 시점에서 다시 협객물을 찍는다면 어떤 결과를 낼 수 있을지 시험하자고 마음을 고쳐먹고 ‘장군의 아들’의 연출을 수락하게 된다.

1989년 8월 18일, 서울 남산의 힐튼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치러진 ‘장군의 아들’의 신인배우 공개 오디션에는 대략 2,000명에 달하는 지원자들이 몰렸다. 임 감독, 이 사장, 정일성 촬영감독, 배창호 감독, 곽지균 감독, 이명세 감독, 안성기, 강수연 배우 등이 심사위원으로 자리를 지킨 가운데 치러진 이 오디션에는 배역들을 20대로 한정짓는다는 조건이 걸려있었다. 당초에는 주요 배역진만 선발할 예정이었던 이 공개 오디션은 결과적으로 조연, 단역까지 모두 뽑아 총 44명이 통과하게 되었고, 한국영화사에 특기할만한 일대 사건으로 남게 된다. 하야시 역에 신현준(2,000명의 참가자 중 유일하게 하야시 역을 자원했다.), 쌍칼 역의 김승우, 김동회 역의 이일재, 신마적 역의 김형일, 화자 역의 방은희, 김기환 역의 민응식, 왕마귀 역의 김해곤 등이 이 시기에 데뷔해 한동안 인력풀이 정체되어있던 한국 영화계 배우의 면면을 일신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단역 중에는 술집 낙원회관의 종업원 역으로 연기 생활 초년이었던 시절의 황정민도 있었으니 ‘장군의 아들’은 유망주의 등용문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다만 장기적인 관점에선 옳은 결정이었음에도, 이로 인해 임 감독은 촬영 기간 내내 크나큰 고통을 받게 된다.

영화 '장군의 아들'(1990). 한국일보 자료사진
 ◇무술 경험 전무했던 새 ‘김두한’ 

1,575대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 김두한 역을 꿰찬 신인 박상민은 당시 갓 20세가 된 서울예대 1학년이었다. 오디션 자리에선 진도 아리랑을 부르고 연극 ‘품바’의 한 대목을 즉석에서 연기해 보이며 감독의 눈길을 끌었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육상과 수영을 한 경력이 있어 신체적인 조건, 운동 신경 자체는 좋은 편이었지만 무술을 접한 경험은 전무했다. 무술 경력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시연하면서 어설픔이 드러나 임 감독으로부터 “뻥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원래 이 사장은 김두한 역에 박중훈이나 최재성, 하야시 역에는 정보석을 내정해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신인 배우를 고집한 임권택 감독의 선택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압구정 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참 사내답지 않은 아이들이 지천인 거예요. 그 아이들을 데리고 1930년대 경성 거리에서 살아간 사내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거죠.” ‘장군의 아들’의 초점을 김두한의 청년 시절 성장담에 맞추었기 때문에 기존의 김두한 영화에서 장동휘 등이 고수해온 완숙하고 중후한 인상과 차별화를 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상민이 지닌 우수에 찬 눈매는 감독이 원하던 청년 김두한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오디션을 통과한 박상민을 포함한 44인의 신인들은 연기와 액션을 특별 지도받고는 1990년 1월 6일, 1930년대의 종로와 우미관을 재현한 세트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대략 3개월 정도면 완료할 거라 생각했던 당초의 계산은 완전히 어긋나게 되어 촬영은 여름까지 늘어졌다. 제작진의 목표는 극장 성수기인 여름 방학 기간에 간신히 맞추는 걸로 바뀌었다. 연기의 동선이나 장면의 연결을 알지 못하고 때때로 발성이 되지 않는 등, 실수를 연발하는 신인들의 미숙함으로 인해 재촬영을 거듭하면서 제작 일정은 한참 지연되었고, 이 때문에 현장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감독은 술회한다. “내가 영화를 찍다 중간에 덜컥 겁이 나보기는 처음이에요. ‘어쩌려고 내가 이런 건가?’ 하는 순간을 매번 촬영 때마다 마주친 거요. 그래도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활기라는 게 있잖아요. ‘내가 그걸 놓치면 안된다’라는 심정으로 찍어나간 거죠.”

관객들이 1990년 '장군의 아들'을 보기 위해 서울 종로구 단성사 앞에서 몰려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흥행 영화 

자칫하면 촬영을 중단할 뻔한 위기를 임기응변과 기지로 극복해야 했던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촬영 막바지에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고 돌아가던 박상민이 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싸움을 벌이다 얼굴에 정통으로 발차기를 맞아 피멍이 들었던 것이다. 제작진에 비상이 걸리고 긴급회의를 벌이던 중, 임 감독은 애초 각본과 콘티에는 없었던, 김두한이 인천에서 상대 패거리에게 맞는 장면을 새로 구상해 위기를 모면했다. 김두한의 부하 중 한 명을 맡은 배우가 장면의 연결을 신경 쓰지 않고 머리를 깎고 촬영장에 나타나자, 그를 카메라의 초점거리로부터 떨어뜨려 잘 보이지 않게 처리해 넘기기도 했다.

그리하여 1990년 6월 9일 종로의 단성사에서 개봉한 ‘장군의 아들’은 당일 오전 10시 30분 첫 상영부터 유료입장권이 모두 매진되고, 영화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행렬이 극장으로부터 종로 3가를 돌아서 종묘까지 이어지는 등 심상찮은 흥행의 조짐을 보였다. 이 사장의 회고에 따르면 영화를 보기 위해 지방에서 상경하거나 하와이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언론에서 피카디리에 걸린 신상옥 감독의 ‘마유미’(1990)나 대한극장에 걸린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을 여름 극장 흥행의 쌍두마차로 점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는 여름 방학 기간을 지나 추석을 거쳐 12월 연말이 될 때까지 초장기 흥행에 돌입했고, 그 결과 ‘장군의 아들’은 서울 관객 68만명의 대박 흥행을 기록한다. 이전까진 김호선 감독의 ‘겨울 여자’(1958)가 세운 서울 관객 58만명이 최고 기록이었던 시절이었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3편)에만 장장 4년 8개월을 매달려 있던 임권택 감독은 오랜 외도를 끝내고 작가로서의 본령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갈수록 흥행 성적이 깎이긴 했으나 시리즈가 거둔 상업적 성공은 임권택 감독으로 하여금 차기작을 자유로이 선택할 창작의 재량을 안겨주었다. ‘태백산맥’(1994)이 연기되어 1년여의 일정이 텅 비게 되자 "어디 흥행은 개의치 않고 마음껏 만들고 싶은 걸로 만들어보세요"하는 이 사장의 권유를 받아들인 임 감독은 이청준의 소설 ‘남도사람’의 1부와 2부를 바탕으로 소리꾼의 인생유전을 그린 영화에 들어갔다. 바로 ‘서편제’(1993)였고 누구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 ‘소품’은 ‘장군의 아들’을 훌쩍 상회하는 서울 관객 100만명을 기록하며 임권택 필모그래피의 최고 흥행작이 되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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