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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고 명료한 그림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공공안내표지 속 픽토그램 중 여성과 육아를 당연시하듯 제작된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같은 픽토그램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개인의 양육 태도나 가치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왼쪽은 기저귀 교환대, 오른쪽은 에스컬레이터 탑승 시 어린이 보호를 지시하는 픽토그램.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에 부착된 에스컬레이터 안전 주의 안내표지. 어린이의 보호자로 여성이 그려져 있다.
홍대입구역 에스컬레이터 앞에 고객 안전 주의 픽토그램이 게시돼 있다. 이 중 어린이 보호를 위해 손을 잡을 보호자는 대부분 여성으로 묘사된다.
경기 고양시의 한 대형마트 남자 화장실에 부착된 두 개의 기저귀 교환대 안내표지가 대조적이다. 마트 측에서 부착한 안내표지(붉은색)는 치마 입은 여성이 주인공인 데 반해 교환대 제조사가 붙인 그림은 인물의 성 구분이 없다. 교환대 제조사는 외국 기업이다.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 남자 화장실에 부착된 기저귀 교환대 안내표지. 치마 입은 여성이 기저귀를 교환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성 역할 고정관념을 은연중에 심어준다는 지적을 받는다.

아기 기저귀 교체는 엄마만의 몫이 아니다. 여자 화장실뿐 아니라 남자 화장실 벽면에도 기저귀 교환대가 설치돼 있는 시대 아닌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견고한 사회지만 ‘여성이 육아를 전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만은 허물어져가고 있다. ‘2018 전국 출산력 및 가족 보건, 복지 실태조사’만 봐도 미혼 여성 중 90.5%, 남성은 84.9%가 ‘아내의 할 일이 가정과 가족을 돌보는 것’이라는 견해에 반대했다.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 1층 남자 화장실에도 기저귀 교환대가 갖춰져 있다. 성 역할 구분이 지금보다 더 확고하던 2007년 설치됐으니 양성평등의 정신을 앞서 실천한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옆에 부착된 안내 그림 속에선 무려 12년 동안이나 치마 입은 여성이 기저귀 교환을 전담해 오고 있다. 이처럼 안내 표지가 현실에 뒤처져 있는 데 대해 박물관 측은 “기존에 제작해 둔 안내판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올해 안에 박물관 내 픽토그램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성인의 모습으로 전면 교체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육아는 여성이’ 강요하는 공공안내표지 

기저귀 교환대 안내표지 외에도 육아를 여성만의 역할로 묘사한 픽토그램은 공공장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양성평등주간(7월 1~7일)을 앞두고 서울 강남역과 홍대입구역의 안내 표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본 결과 ‘아동 보호’를 지시하는 픽토그램 대부분이 보호자를 여성으로 묘사했다. 에스컬레이터 및 무빙워크 38대에 부착된 313개의 안전 주의 픽토그램에 아동과 보호자가 등장했는데, 이 중 보호자를 여성으로 표현하지 않은 경우는 단 3개에 불과했다.

공공장소에 설치된 안내표지는 한눈에 직관적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사람의 형상이나 행동을 단순화한 ‘픽토그램(Pictogram)’의 형태를 띤다. 문맹자나 외국인도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도록 그 도안은 일반성과 통일성을 갖춰야 한다. 따라서 공공안내표지의 경우 ISO국제표준 및 국가기술표준원의 디자인을 따르는 게 보통이다. ‘엄마와 아이’를 표현한 픽토그램 역시 국가기술표준원이 만든 ‘디자이너를 위한 그래픽심볼 제작 가이드’의 ‘아동 보호’ 도안이 적용됐고, 비슷한 픽토그램이 강남역과 홍대입구역 외 다양한 공공장소에 부착돼 있다.

서울 강남역과 홍대입구역에 부착된 에스컬레이터 및 무빙워크 안전 주의 안내표지. 어린이의 손을 잡고 동승하는 보호자의 모습을 거의 다 여성으로 묘사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의 경의중앙선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출입문 끼임 주의’ 안내표지가 부착돼 있다. 왼쪽 픽토그램 속에서 유모차를 끄는 보호자가 여성으로 묘사돼 있다.
지하철역 안전 주의 관련 픽토그램 분석 결과. 그래픽=강준구 기자

이처럼 무수히 많은 장소에 반복 배치되는 공공안내표지에 성 역할을 구분하는 고정관념이 배어 있다는 점은 문제다. 무심히 지나친다 해도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인식 과정에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진경 서강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엄마가 아이를 돌보는 모습을 그린 표지판에 자주 노출되면 무의식적으로 엄마와 육아를 당연하게 연결 짓는 ‘암묵적 연합(Implicit association)’을 형성하게 되고 이렇게 생겨난 고정관념이 개인의 양육 태도나 가치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픽토그램 도안이 성 역할 구분을 은연중에 심화한다는 지적에 대해 국가기술표준원 관계자는 “픽토그램 디자인에는 사회에서 기대하는 남성, 여성상이 반영돼 왔는데, 최근 성 역할 구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고 있어 기존 디자인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서도 “이를 위해선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아직 이 과정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교통안전표지도 보호자는 ‘엄마’ 

여성을 아동의 보호자로 묘사하기는 교통안전표지도 마찬가지다.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에 따라 어린이보호구역에 설치된 ‘어린이 보호’ 표지판을 보면 아이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호자가 역시 여성이다. 도로교통공단 관계자는 25일 “해당 표지판은 아이가 아빠보다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다는 사회적 통념에 기반해 제작되었다”면서 “표지판 그림을 수정할 계획은 아직 없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지하철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부착된 ‘유모차 출입문 끼임 주의’ 안내표지에도 유모차를 미는 여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경기 고양시의 한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 부근에 ‘어린이 보호’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도로교통법에 따라 표지판 속 보호자는 여성으로 표현돼 있다.

장미현 젠더공간연구소장은 “아동을 돌보는 사람은 항상 여성, 정보나 지식을 제공하는 사람은 남성으로 등장하는 성차별적 픽토그램은 개인의 인식뿐 아니라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성 평등적 관점에서 안내표지를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여세연 부대표는 “픽토그램 도안의 설계 단계부터 성인지적 관점을 가진 전문가와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 등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도 사회적 편견을 완화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정예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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