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이념 논쟁에 묻혀버린 원전 안전

입력
2019.06.26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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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수출하고도 정비는 하도급 계약’ vs ‘정비사업권 수주, 탈원전 영향 없었다’.

우리나라의 원자력발전소 수출 1호인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의 정비사업을 우리 기업들이 수주했다는 계약 내용을 보도한 언론 매체들은 극명한 시각 차를 보여줬다. 한쪽은 탈원전 정책 때문에 한국이 하도급 업체로 전락했다며 정부를 성토했고, 다른 한쪽은 불발될 뻔한 계약이 성사됐다며 탈원전 영향은 없었다고 못박았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나라를 둘로 쪼개 놓았다.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은 채 공약부터 던져 놓은 결과다.

24일 UAE 원전 정비 계약 내용과 탈원전 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불붙은 사이 국내 원전 현장에서 일어났던 심각한 위법 행위가 공개됐다. 위법 행위의 주체인 한국수력원자력이 해당 계약 내용을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위법 조사 결과 발표 당일 내놓은 것도 참 공교롭다. 정기점검 후 재가동을 준비하던 한빛 1호기 현장에선 안전을 위해 반드시 준수돼야 할 법과 절차가 무시됐다.

원안위에 따르면 현장 관계자들은 출력이 비정상적으로 올라갔음을 인지했는데도 증기발생기와 보조급수펌프 이상만 보고했다.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는 부분은 빼놓은 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현상만 알린 것이다. 더구나 원전의 브레이크에 해당하는 제어봉 조작은 무면허 직원에게 맡겼고, 조작에 필요한 기본적인 계산마저 틀렸다. 관련 교육도 회의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지경이 됐는데 원안위는 한수원 탓만 할 뿐 자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국내 원전 현장이 이럴 정도인데, 외국에 우리 기술을 더 사달라고 요구하기가 염치 없어 보인다.

원자력 쓰레기를 쌓아 놓은 연구 현장 부실도 심각하다. 원안위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2015년 이후 경주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로 보낸 방폐물 중 상당 부분의 방사능 정보에 오류가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21일 밝혔다. 체계적인 방폐물 분석 절차와 규정을 갖추지 못한 원자력연구원은 자의적 판단과 오류를 반복했다. 방폐물 종류와 위험도 등도 정확히 분석하지 못하면서 ‘쓰레기 내보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고준위 원전 쓰레기(전기를 생산하고 남은 사용후핵연료) 문제는 도무지 해결 기미가 안 보인다. 사용후핵연료를 임시로 넣어둔 공간들은 2021년부터 차례로 꽉 찬다. 코 앞이다. 다른 단기 저장시설을 짓든, 영구히 묻을 처분시설을 만들든 정부가 나서야 한다. 지난 정부가 만들어놓은 계획을 재검토해 제대로 대책을 세우겠다던 문재인 정부의 약속은 그러나 슬금슬금 미뤄지고 있다.

탈원전을 하든 안 하든, 가동 중인 원전은 무조건 안전해야 하고, 원자력 쓰레기는 반드시 처분해야 한다. 현장 안전과 방폐물 관리를 믿을 수 없는데 원전 수출 확대만 외치는 건 무책임하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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