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냉전의 개막전 베를린 봉쇄 (6.24)

입력
2019.06.24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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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식량을 실은 미 공군 수송기가 서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으로 진입하는 장면. 베를린 봉쇄 당시 주민들은 미국의 항공 보급으로 생존했다. USAF 사진
1948년 식량을 실은 미 공군 수송기가 서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으로 진입하는 장면. 베를린 봉쇄 당시 주민들은 미국의 항공 보급으로 생존했다. USAF 사진

2차대전 연합국은 1945년 2월의 얄타회담과 7월 포츠담회담으로 패전국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유럽 처리 문제의 얼개를 짰다. 미국과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은 공동관리위원회를 두어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양국 수도를 분할 통치하기로 했다. 문제는 베를린과 빈 도시 공간만 분할통치하기로 했지 그 도시를 나고 드는 도로 등 교통접근권에 대한 논의와 보장 합의가 없었다는 거였다. 그 때문에 베를린을 두고 초등학생들의 교실 책상 금 긋기와 다를 바 없는 신경전이, 물론 훨씬 살벌한 긴장 속에서 48년 6월 24일부터 이듬해 5월 12일까지 321일 동안 이어졌다. 이른바 ‘베를린 봉쇄(Berlin Blockade)’였다.

점령지를 중심으로 소련의 분할지는 독일 동부였고,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서부를 나누어 통치했다. 베를린은 동서경계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안쪽, 즉 소련 점령지 내에 있었다. 종전 직후에야 암묵적인 합의 혹은 선의로 별 문제가 없었지만,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확대와 동독 내 친 소비에트 단일 정당(사회주의 통일당) 설립 등으로 긴장이 고조되면서, 46년 3월 영국 수상 처칠이 유엔 연설에서 ‘철의 장막’이란 표현으로 소련의 비밀 패권주의를 비난하고, 미국이 유럽 부흥과 소련의 팽창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일석이조의 마셜 플랜(47년 6월)으로 소련을 자극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48년 3월 소련은 서방의 서독 중심 마르크 단일통화 도입 방침에 항의, 연합국 공동관리위원회에서 탈퇴했다.

하루 10차례 철도 통행과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뷔케부르크 등 3개 공항의 베를린 항공 노선을 개방했던 소련은 도이치 마르크화가 유통(6월 21일)된 지 사흘 뒤인 24일 서베를린과 서방 진영을 잇는 모든 도로와 철도 노선을 폐쇄했다. 졸지에 봉쇄를 당한 서베를린에는 전후의 식량난과 생필품난에 시달리는 주민 200만여명이 있었다.

무력으로 봉쇄를 뚫자는 강경파와 전쟁 위험을 감수할 만큼 베를린이 중요하냐는 온건파 사이에서 트루먼은, 서베를린은 지키되 무력 충돌은 피하는 전술을 택했다. 생필품 항공 보급이었다. 미국은 300여일 하루 평균 1.534톤의 식량과 3,475톤의 석탄 및 경유를 수송기로 실어 날랐다.

소련은 서방의 동유럽 철ㆍ석탄 보복봉쇄에 못 견뎌 49년 5월 12일 베를린 봉쇄를 해제했고, 냉전의 개막전도 무승부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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