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보기] 안식의 조건

입력
2019.06.01 04:40
26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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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중단하고 안식월을 보낸 지 3개월째 접어들고 있다. 그리고 다음 달이면 안식월도 끝이다. 안식의 계기는 단순했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소진됐고, 그래서 우울증에 걸려 더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안식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결심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 소진된 삶을 회복하기 위한 극단의 처방이었다.

안식년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후로 가장 먼저 한 일은 돈을 모으는 일이었다. 나에게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을 하며 안식을 취할까’라는 기대보다 ‘어떻게 일하지 않는 몇 달 동안 경제적 걱정 없이 버틸 수 있을까’였다. 회사를 그만둘 예정이었고, 그동안 서울에서 월 200만원 안팎의 수입으로 살면서 딱히 모아둔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안식년에서 안식월로 계획을 수정했다. 몇 개월 동안만이라도, 결코 다시 일하는 상황은 만들지 않기 위해, 반년 이상을 이전보다 더 무리해서 일하며 저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정된 날이 되었을 때, 나는 예상했던 저축액을 다 채우지 못했지만 몇몇 지인의 도움으로 미국에 올 수 있었다.

그동안 일하면서 긴장했던 몸이 풀리는 데 한 달이 걸렸고, 낯선 환경이 익숙해질 무렵 적당히 살아가는 삶이 시작됐다. 하루에 운동은 30분 정도, 공부는 3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봉사활동을 간다. 주변에 있는 도서관, 박물관을 이용한다. 친구를 초대하고 함께 식사한다. 하늘을 본다. 비를 맞는다. 석양을 본다. 단순하고 평범한 일이지만, 이것을 조정하고 배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 ‘적당히’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 찾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백의 시간을 그대로 두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 일상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매일 아침 몸이 가뿐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아졌고, 웃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데 흥미가 생겼고,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고, 지인의 안부가 궁금해졌고,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따라 부르는 일이 늘었다. 관계, 학습, 욕망, 유희 등 살아가는데 즐거움을 주는 요소들이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다. 이전에는 즐거움의 감각을 의도적으로 차단하거나 상실한 상태로 지내왔다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향유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곳에서도 간혹 차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지만, 동시에 차별을 받아칠 수 있는 여유와 힘도 생겼다. 석 달째 접어들었을 때, 나는 다시 일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나는 종종 이런 상상을 하고는 한다. 만일 내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을 때, 나에게 기본소득과 같은 제도적 안전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만일 내가 퇴사를 하고 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면, 나는 조금 더 일찍 안식을 계획하고 더 많은 것을 시도했을 것이다. 또 우울증에 걸린 상태에서 무리하게 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주저하거나 지연시키기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시도해 봤을 것이다. 내가 마련할 수 있는 조건 안에 나를 가두기보다 무한한 가능성에서 나를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은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경제적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보고자 할 때 시도해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된다. 안식은 삶에 대한 보상이자 회복이자, 삶을 채비하는 휴식의 시간이다. 나만 누리기 아까운 이 안식을, 더 많은 이가 누리기 위해서는 안식을 위한 사회적 조건이 필요하다. 적어도 개인이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차등 때문에 쉼마저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서 시작된 보호 장치 같은 것 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본소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천주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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