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밖 과학] 글자 뒤집어 쓰기 좋아한 다빈치가 ADHD?

입력
2019.06.01 13: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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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게티이미지뱅크
레오나르도 다빈치. 게티이미지뱅크

‘먹튀’도 이런 먹튀가 없었다. 커다란 기마상을 만들다가 갑자기 대포를 만들겠다고 하질 않나, 그러다 또 새로운 물감을 만드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면서 대포 제작은 손 놓아버리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한 채 제멋대로이기만 했던 사람. 15세기 이탈리아 밀라노 지역 루도비코 일 모로 공작으로부터 20년 동안이나 금전적 후원을 받았지만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루도비코의 프로젝트 중 어느 것 하나도 완성하지 못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가 낳은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얘기다.

다빈치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미술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걸작을 남겼다. 회화는 물론이고 건축, 철학, 조각, 해부학, 수학, 작곡 등 다방면에 능했다. 그러나 왕성한 두뇌활동과 여러 분야에 대한 관심에 쫓기 탓인지 다빈치는 한 번 시작한 일을 마무리 하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1478년 그림 그리는 일을 단독으로 처음 맡았을 때부터 그랬다. 성당 제단 뒤에 걸 제단화를 그리는 일이었는데 다빈치는 밑그림만 그리고 그만 뒀다.

대표작인 모나리자도 미완성으로 남았다. 당시로서는 비교적 긴 생애(1519년 5월 2일 67세로 사망)를 보냈으나 일생 동안 완성한 그림은 20개도 안 된다.

다빈치가 세상을 떠난 지 500주년 되는 올해 그의 변덕스러운 천재성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국 런던에 위치한 공립 종합대학 킹스칼리지런던의 마크로 카타니 정신의학ㆍ심리학 교수는 지난달 28일 뇌과학 분야 국제학술지 ‘브레인’에 “다빈치가 ADHD 환자였을 거란 가설은 그의 예술 활동을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라는 내용의 기고문을 실었다. 자폐증과 ADHD 치료 전문가인 그는 다빈치의 작업 방식과 행동, 역사적 기록, 동시대인의 증언 등을 통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ADHD는 집중력이 부족해 산만하거나, 과잉행동을 보이고, 하나의 일을 끝내지 못한 채 당장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는 정신 질환이다.

우선 다빈치가 왼손잡이였다는 사실을 꼽았다. 좌뇌보다 우뇌가 더 발달했다는 뜻이다. 그는 또 거울에 비춘 것처럼 글자와 숫자를 뒤집어 적는 거울 쓰기(mirror writing)를 즐겨 했다. 문자를 틀리게 쓰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이는 공간지각 기능을 담당하는 우뇌에 비해 언어를 담당하는 좌뇌의 기능이 뒤처져 앓는 난독증의 대표 증상이다. 카타니 교수는 “이런 사실은 ADHD 환자들처럼 다빈치도 언어 부문의 지배력을 우뇌가 가졌다는 걸 알려주는 간접적인 증거”라며 “다빈치는 거의 잠을 자지 않은 채 밤낮으로 계속 일했는데, 이것 역시 ADHD 환자들에서 나타나는 행동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특징을 가진 사람들은 예술적 능력이 높은 경우가 많다. 왼손잡이 학생들이 음악과 미술을 전공하는 경향이 더 높다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난독증을 앓는 사람은 시각기억 능력이 뛰어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시각기억은 대상을 이미지로 기억하는 방식이다. 전화번호를 외운다고 할 때 숫자 하나하나를 되새기는 대신, 전화기 번호판을 떠올려 숫자의 각 위치를 기억하는 식이다. 이런 방법을 쓰면 기억을 더 잘 할 수 있다.

지구 밖에 있을 거라 생각되는 외계 과일을 그려보라고 한 미국 미시간주립대의 연구결과,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을 받은 이들이 그린 외계 과일(오른쪽)이 일반인들이 상상한 것(왼쪽)보다 더 창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시간주립대 제공
지구 밖에 있을 거라 생각되는 외계 과일을 그려보라고 한 미국 미시간주립대의 연구결과,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을 받은 이들이 그린 외계 과일(오른쪽)이 일반인들이 상상한 것(왼쪽)보다 더 창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시간주립대 제공

지난해 9월 미국 미시간주립대 연구진은 ADHD 환자들의 창의성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높다는 내용의 논문을 국제학술지(Journal of Creative Behavior)에 실었다. 이들은 ADHD 진단을 받은 학생 26명과 그렇지 않은 26명을 대상으로 외계 과일(alien fruit)에 대해 그려보라고 했다. 그 결과 ADHD를 진단받지 않은 이들은 사과, 딸기 등 기존 지구의 과일을 바탕으로 외계 과일을 상상했다. 반면 ADHD를 앓는 학생들은 망치나 안테나 등 과일과 전혀 상관없는 물건들의 생김새와 특성을 활용, 외계 과일을 그렸다. 연구진은 “ADHD 증상이 있는 이들의 생각이 일반인보다 더욱 혁신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사회에서 비주류 혹은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행동이 꼭 문제만 갖고 있는 건 아니란 얘기다.

카타니 교수는 “ADHD를 지능이 떨어지고 이상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의 전형적인 문제로 보는 경향이 만연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다빈치의 사례처럼 ADHD는 낮은 지능지수(IQ)나 창의력 결핍과 무관하다”며 “ADHD가 문제가 되는 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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