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C]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입력
2019.05.30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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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추정되는 발사체가 '이동식 발사차량'(TEL)에서 공중으로 치솟고 있다. 10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전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도 아래 조선인민군 전연(전방) 및 서부전선방어부대들의 화력타격훈련을 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중앙통신이 공개한 훈련 모습.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추정되는 발사체가 '이동식 발사차량'(TEL)에서 공중으로 치솟고 있다. 10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전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도 아래 조선인민군 전연(전방) 및 서부전선방어부대들의 화력타격훈련을 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중앙통신이 공개한 훈련 모습.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의외로 기자가 무모한 직업이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는 확신이라도 가진 때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자주 있는 경우가 아니다. 무작정 기다리기 일쑤다. ‘팩트’는 겸손을 요구한다. 예단은 금물이다. 대기하라는 주문(注文)이 내려간다. 되뇌어야 하는 주문(呪文)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일종의 부조리극 같다. 누구인지, 언제 올지도 모를 고도를 기다리는.

실제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우리는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다. 모든 변수와 원리를 알 수 없으니 결과적으로 필연도 우연이다.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장 폴 사르트르)는 명제가 출발점인 실존주의를 배태한 건 두 번의 세계대전이 지나간 뒤 유럽에 드리운 허무와 불안이었다. 상상 못한 대재앙에 그저 아연했을 테다. “과연 내일 아침에도 동산에 해가 떠오를지”(1955년 발표된 장용학의 단편 소설 ‘요한시집’)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불확실성을 고스란히 수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에 등장하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푸념한다. “내 기억력은 쓰레기 하치장과도 같다”. 그가 ‘불망증’(不忘症) 환자가 된 건 말에서 떨어져 뇌를 다친 뒤부터다. 실제 천재적 기억력을 동반하는 ‘서번트 증후군’은 뇌 기능 장애가 원인이다. 정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범인(凡人)에게 평생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돼 있다. 모든 우연에 에너지를 쏟을 수 없다. 그건 성실이 아니라 나태다. 선택과 집중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달 초 북한이 두 차례 쏴 올린 ‘발사체’가 신제품인 모양이다. 도달 범위가 한반도 내로 제한되는 단거리 미사일이라는 게 지금껏 군이 분석한 북한 자칭 ‘신형 전술유도무기’의 정체다. 전문가들 추정대로 러시아산 지대지 탄도 미사일 ‘이스칸데르’의 개량형이라면 비행 고도가 낮고 타격 직전 궤도 변경도 가능해 저고도용(패트리엇)이든 고고도용(사드)이든 지금 한반도에 배치된 요격 무기로는 방어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대책 마련이 급하다”는 관성적 촉구가 다시 목소리를 얻는 분위기다.

하지만 창이 뚫지 못하는 방패는 아직 세상에 없다. 신종을 신종으로만 막아야 한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더욱이 종심(縱深ㆍ전방과 후방 간 거리)이 짧은 한반도에서는 ‘미사일 방어’(MD)라는 개념마저 적용하기 어렵다. 미사일이 서울에 닿는 시간이 길어야 6분이고, 시간당 1만발까지 쏠 수 있는 접경 부근 장사정포를 다 막아낼 도리는 애초 없다. 심지어 방패가 창을 자극한다. 뚫어내려면 더 벼려야 한다. 불안을 줄이려는 대비가 도리어 불안을 키우는 ‘안보 딜레마’에 하릴없이 빠지는 이유다.

이스칸데르를 둘러싼 요즘 난리는 기시감이 있다. 2014년 북한 무인기 소동이다. 기껏해야 수류탄 하나 매달 수 있을 정도로 조잡하다는 사실이 2년 뒤 국방과학연구소에 의해 공개됐지만 당시 “북한의 장난감”(미 CNN)이 부추긴 공포감은 상당했다. 기존 장비로 포착할 수 없다는 성화 탓에 해외에서 레이더를 새로 사와야 했다. 그러나 2년 만에 군이 도출한 결론은 ‘막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생존이 최우선이다. 이스칸데르의 위협이 무인기 수준일 공산도 크지 않다. 그러나 살아남는 데에만 시간과 돈을 다 쓰고 나면 복지는 어쩔 셈인가. ‘행복하게 잘 살고’ 싶은 욕망은 북한도 마찬가지일 테다. 대북 제재 탓에 핵을 놓지 않으면 가난도 떨치지 못하는 ‘핵 보유 딜레마’에 그들이 놓여 있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세계적 군비 확충의 수혜자가 늘 미국이라는 건 공교로운 사실이 아니지 싶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남북이 서로 심어줘야 한다. 봉(鳳)이 되지 않으려면.

권경성 정치부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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