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봉테일’의 가장 빛나는 순간

입력
2019.05.29 19:30
30면

밥때를, 노동시간을 지키며 만든 ‘기생충’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일해 함께 성장하기

칸 ‘황금종려상’에서 읽는 봉준호 리더십

칸 국제영화제 기간 현지에서 열린 '기생충' 공식 기자회견의 한 장면. jtbc 화면 캡처
칸 국제영화제 기간 현지에서 열린 '기생충' 공식 기자회견의 한 장면. jtbc 화면 캡처

“가장 정교함이 빛나는 것은, 밥때를 너무나 잘 지킨다는 거죠.” 칸 국제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배우 송강호가 한 말이다.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란 별칭처럼 제작 전 과정을 정교하게 설계해 “굉장히 행복한 환경에서” 일하게 해 준 감독에 대한 재치 넘치는 찬사였다. 봉 감독이 황금종려상 수상 직후 송씨에게 무릎을 꿇고 트로피를 바치는 장면보다 내게는 더 감동적이었다.

칸에서 날아온 화젯거리가 넘치건만, ‘밥’에 얽힌 에피소드에 유독 눈길이 갔다. ‘기생충’ 상영회에서 기립박수가 끝없이 이어지자 봉 감독은 멋쩍은 듯 “배 고픈데, 배 고프다”를 연발해 웃음을 줬고, 귀국 후 공항 회견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묻자 “충무김밥이 먹고 싶다”고 했다. 이 별 거 아닌 장면들에 왜 끌렸을까. ‘밥’이 우리네 삶과 노동, 나아가 공동체의 상징으로 쓰여온 것에서 나름의 답을 찾았다. ‘나와 너, 우리의 밥, 그리고 밥때를 함께 챙길 줄 아는 정확한 노동’이 있었기에 대중과 평단 모두의 찬사를 받는 성취가 가능했고, 이것이야말로 봉테일의 요체가 아닐까.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 한달 전 나온 영화전문지 씨네21의 인터뷰가 화제가 됐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스토리 빼고 제작 과정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룬 이 인터뷰에서, 눈밝은 독자들은 스태프와 표준근로계약서를 쓰고 노동시간을 지킨 것에 주목했다. 기자가 그로 인한 제작비 상승 우려를 언급하자 봉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좋은 의미의 상승이라고 본다. (중략) 나의 예술적 판단으로 근로시간과 일의 강도가 세지는 것이 항상 부담이었다. 이제야 ‘정상화’돼 간다는 생각이다.”

봉 감독도 밝혔듯이 표준근로계약 준수는 ‘기생충’이 첫 사례는 아니다. ‘꿈의 공장’ 뒤편에서 터무니없는 박봉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스태프들이 전국영화산업노조를 결성하고 투쟁한 끝에 4대 보험 적용, 초과근무수당 지급 등 표준근로계약의 틀이 마련됐고 2014년 이후 본격 도입됐다. 그 덕에 봉 감독 특유의 정교함과 해외 제작 경험이 어우러져 빛을 발한 것이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저예산 영화 현장은 여전히 열악하고, 노동 시간 및 강도와 작품성이 정비례한다고 믿는 낡은 사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종편 등 플랫폼의 증가로 몸집을 불린 드라마 판으로 눈을 돌리면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봉 감독이 ‘기생충’ 국내 시사회에서 “드라마 쪽도 빨리 협의가 이뤄져서 (노동환경 개선이) 잘 정리됐으면 좋겠다”고 언급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칸의 쾌거’에 덩달아 취해서 봉 감독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인터뷰 등을 찾아봤다. 그는 그저 ‘성실한 천재’가 아니었다. “아주 작은 역이나 보조출연자까지 이름을 불러준다”고 말하는 단역배우의 표정에서 깊은 애정과 존경이 느껴졌다. ‘마더’의 주연 김혜자는 “선생님, 아주 좋았어요. 이렇게 한번 더 갈까요?” 하며 원하는 컷을 뽑아내는 집요함을 상찬했다. ‘마더’ 프로듀서로 일한 서우식씨의 말은 더 의미심장하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 쓰면서 자신의 디테일을 완성해가는 사람. 참 좋은 리더다.” 요컨대 봉 감독 특유의 성실함과 집요함은 함께 성취하고 성장하는 기쁨을 나누는 데서 가장 빛난다.

옐로우독 대표 제현주씨의 에세이 ‘일 하는 마음’에서 밑줄 쳐 둔 문장들이 떠올랐다. “권위는 이렇게 행사하는 것이다. 자신이 행사하는 권위의 상징적 무게를 이해하고, 안일하게 둘러쳐 있던 테두리를 필요한 순간에 딱 한 걸음 넘어서 주는 것.” “일을 잘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더 좋은 사람이 되게끔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굳이 일을 잘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모두가 바라지만, 현실의 일터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사람. 봉 감독은 이런 바람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아닐까.

봉 감독은 ‘기생충’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기생이냐, 상생, 공생이 되느냐는 거기서 갈라진다”고도 했다. 상생으로 쌓아 올린 ‘봉준호 월드’의 빛나는 성취가, 사람이 가장 귀한 자산인 모든 노동 현장에서 공생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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