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우민화 목장서 질주했던 ‘애마부인’

입력
2019.06.01 04:40
수정
2019.06.01 10:20
17면

 

 [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14> 5공 시대와 에로 영화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영화 '어우동'. 1980년대 에로 영화 붐을 타고 만들어진 에로 사극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어우동'. 1980년대 에로 영화 붐을 타고 만들어진 에로 사극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년대에 들어서도 군사 독재는 여전했고, 검열의 벽은 높았다. 10ㆍ26 사건으로 유신 정권은 무너졌지만, 곧이어 12ㆍ12 사태로 등장한 신군부가 정권을 잡아 영화에 대한 검열과 통제정책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한국 영화 산업은 좀처럼 불황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고, 외화의 점유율은 압도적이었으며, 사회상에 대한 발언을 담은 리얼리즘 기조의 영화들은 번번이 가위질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다. 실망한 사람들은 자기혐오와 시대에 대한 환멸을 담아 한국 영화를 ‘방화’(邦畵)라고 불렀다. 다만 이 시기에 달라진 것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애마부인’(1982)으로 대표되는 에로티시즘 영화, 줄여서 ‘에로 영화’의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에로 영화는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들과 달리 성애 표현의 제약을 넘어 ‘수위’를 한층 더 끌어올려 대중의 관음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했다.

 ◇독재 정권이 제공한 오락거리 

에로 영화에 검열의 손길이 느슨해진 건 다분히 시대상에 따른 것이었다.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학살로 진압하고 들어선 전두환의 5공화국은 정권에 대한 반발감을 누그러뜨리고 젊은 세대의 저항감을 희석시키기 위해 우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1981년 5월 28일에는 '국풍81'이라는 대대적인 관제행사를 열어 6월 1일까지 5일간 여의도 광장을 쉼 없는 유흥의 장으로 만들었고, 1982년에는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는가 하면 37년 만에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어 술집, 모텔, 유흥업소와 성매매 등의 향락 산업이 활성화되었다. 이듬해인 1983년에는 프로축구 리그와 민속씨름이 열려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다. "국민을 다스리는 방법은,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된다"는 아돌프 히틀러의 말처럼 오락거리를 제공함으로써 대중의 시선을 정치로부터 돌리고 체제에 순응케 하려는 계산이 깔린 조치였다. 체벌과 교련, 규제와 검열은 유지하되, 유흥 문화로 숨통을 조금 풀어주며 길들이는 ‘채찍과 당근’의 시대, 3S 정책(섹스, 스포츠, 스크린)의 시대였다.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한형모의 ‘운명의 손’(1954)이 단지 키스 장면(한국영화 최초의 키스 장면이었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출연배우 윤인자의 남편이 감독을 고소하는가 하면, 유현목의 ‘춘몽’(1965)이 외설 시비에 휘말리는 등, 보수적인 시대 분위기 속에서 한국 영화의 에로티시즘은 억압되어 왔다. 그러나 성애 묘사에 대한 금기와 제한은 1980년에 들어 정윤희 주연,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 등이 나오면서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에로스 해방의 물꼬를 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정인엽의 ‘애마부인’이었다. 김기영 감독의 연출부 생활을 하며 ‘십대의 반항’(1959)에 배우로 출연했던 그는 ‘결혼교실’(1970)에서 문희, 남정임, 윤정희의 트로이카 3인방을 모조리 캐스팅하는 기염을 토하는가 하면 ‘명동 왈가닥’(1967), ‘청색시대’(1976), ‘자! 지금부터야’(1977) 등 코미디와 멜로 드라마에 일가견을 보인 흥행 감독이었다.

 ◇미국 연수가 가져다 준 에로 영화 

‘애마부인’을 만들게 된 계기는 1979년 미국으로 연수를 떠나면서 찾아왔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공부하는 한편, 뉴욕의 극장가를 돌아다니던 정인엽은 당시 한국에선 검열과 규제로 접할 수 없었던 여러 편의 B급 공포영화나 에로티시즘 영화를 다수 섭렵하게 된다. 그 중에서 특히 그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말콤 맥도웰 주연의 ‘칼리굴라’(1979)였다. “그러다 뉴욕 51번가에 있는, 내 키만한 남자 성기 2개가 서 있는 극장에서 말로만 듣던 ‘칼리귤라’를 봤어. 장장 두 시간 반이나 되는 영화를 보고서, 아, 나는 크게 충격받았어. 특히 말과 직접 성관계를 갖는 장면을 마주하고선 놀라 자빠졌지. 그렇게 1년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비행기 안에서 그 장면이 갑자기 떠오르는 거야.” 정윤희, 하명중 주연의 ’꽃순이를 아시나요‘(1978)로 일찌감치 호스티스 영화를 만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검열의 족쇄에 메여 제약받았던 기성 한국 영화의 성애 묘사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정인엽은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에로티시즘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발상을 갖게 된다.

영화 '애마부인' 포스터.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애마부인' 포스터. 한국일보 자료사진

작가 조수비(딸인 김혜리는 ‘변강쇠’(1986)의 하녀 역으로 영화에 데뷔한다)가 쓴 소설 ’애마부인‘을 떠올린 정인엽은 심의가 나올 리 없다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친 채, 연방영화사의 대표 최춘지와 손잡고 ’애마부인‘의 메가폰을 쥔다. 그러나 캐스팅부터 쉽지 않았다. 우선 정인엽이 고르려 했던 여배우의 조건부터 까다로웠는데, 팔등신에 165㎝ 이상의 키, 섹시하고 개성이 있는 눈매와 풍만한 가슴, 더 나아가 성에 대한 이해가 있는 서른 두 살 정도의 기혼 여배우였다. 처음 섭외한 탤런트 두 명은 상반신까지만 노출한다는 조건을 내건 탓에 캐스팅이 수포로 돌아갔고, 배역은 23세의 무명 연극배우 안소영에게 돌아갔다.

 ◇심의를 교묘하게 피한 ‘애마 부인’ 

성애 표현에 있어 이전보다 관대해졌다지만, 음모를 비롯한 특정 신체부위의 노골적인 노출은 허락하지 않던 시대였다. 애마(愛馬)라는 제목이 심의에 걸려 반려되자 발음만 같은 애마(愛麻)로 바꾸는가 하면(주스트 자킨의 ‘엠마뉴엘’(1974)을 의식하고 음차한 제목이란 말이 있지만, 의식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성애를 주제로 삼는 영화임에도 섹스라는 단어는 대사에 딱 한 번 쓸 정도로 트집 잡히지 않고자 조심했다. 어떤 식으로든 수위를 높이고 싶었던 정인엽은 연출가로서 떠올릴 수 있는 갖은 편법과 꼼수를 동원했다. 주인공 오수비(안소영)이 빗 속을 뚫고 가시덤불을 헤치는 장면의 경우는 안소영에게 여성용 속옷 슈미즈를 입게 하고 찍었는데, 옷이 젖어서 알몸이 비치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옷을 벗고 노출을 한 건 아니었기에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공연윤리위원회(공윤)에 제출하는 필름은 일부러 화면이 어둡게 보이도록 따로 현상해서 틀었을 정도로 갖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애마부인’은 심의에서 단 한 장면도 잘리지 않았다.

알몸으로 말을 타는 장면은 제작과정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은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목장이 많은 제주도를 로케이션 촬영지로 염두에 두었지만, 워낙 저예산이었던 탓에 배우와 기자재를 모두 옮기는 비용조차 감당할 수 없었던 제작진은 경기 수원시의 목장에서 이 장면을 찍었다. 안장 같은 안전장비도 없이 벌거벗은 맨몸으로 말을 타라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고, 안소영은 이 장면을 찍다가 하혈까지 하는 고충을 겪었다. 울음을 터뜨리며 촬영을 거부했지만, 이 장면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정인엽은 난색을 표하는 배우를 달래가면서 찍었고, 이 장면은 ‘애마부인’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사방이 트인 야외에서 알몸을 드러내는 이 장면의 몽환적인 에로스는 성적 관능을 감추어야 할 치부처럼 여겼던 시대 분위기에 정면으로 반하며 관객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1982년 '애마부인'이 상영되고 있는 서울극장 앞에 관객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2년 '애마부인'이 상영되고 있는 서울극장 앞에 관객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2년 2월 서울극장에서 개봉한 ‘애마부인’은 4개월간의 장기 흥행에 돌입해 31만5,000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극장의 매표소 유리창이 깨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애마부인’의 성공에 고무된 영화인들은 ‘성의 스펙터클’을 무기로 삼아 저예산으로도 짭짤한 수입이 보장된 에로영화에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었다. 이장호는 ‘무릎과 무릎 사이’(1984)와 ‘어우동’(1985)으로 각각 26만명과 39만2,000명의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재기에 성공했고, 이두용은 토속적 색채가 짙은 사극 에로물 ‘뽕’(1986)을, 정지영은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2)로 이 대열에 합류했다. 안소영은 김수형의 ‘산딸기’ ‘암사슴’ ‘불바람’(1982) 등의 아류작에 연이어 출연했고, 원미경, 이미숙, 이보희 등도 시대의 섹스심벌로 스크린을 수놓았다. 한국영화의 1980년대는 에로 영화의 전성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양산된 에로영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선함을 잃고 천편일률적인 저질 오락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장선우는 ‘새로운 삶, 새로운 영화’라는 글에서 ‘소비적인 성유희를 위해 창녀, 호스티스, 여대생, 유부녀 할 것 없이 모두 끌어내 분칠했다‘며 호되게 비판했다. 군부독재가 강고히 버티고 있는 현실에서 에로티시즘의 낙원으로 도망하는 일은 공허하고 비겁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다. 한국영화는 새로운 출구를 찾고 있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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