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맛빠기! 인도네시아] 해 뜨면 금식, 해 지면 탐식 ‘라마단의 두 얼굴’

입력
2019.05.30 04:4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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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무슬림의 의무, 라마단 

※ 인사할 때마다 상대를 축복(슬라맛)하는 나라 인도네시아. 2019년 3월 국내 일간지로는 처음 자카르타에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는 격주 목요일마다 다채로운 민족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의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를 선사합니다.

라마단 기간인 24일 미처 사원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금요일 연합예배가 시작되자 무슬림들이 즉석에서 차가 다니는 도로에 자리를 깔고 기도하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라마단 기간인 24일 미처 사원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금요일 연합예배가 시작되자 무슬림들이 즉석에서 차가 다니는 도로에 자리를 깔고 기도하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오후 5시30분 어스름이 깔린다.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Adzan) 소리에 맞춰 타고 가던 오토바이가 길가에 멈춘다. 승객에게 양해를 구한 기사는 좌석을 덮개로 쓰는 보관함에서 물을 꺼내 목을 축인 뒤 다시 목적지를 향한다. 인근 가게 종업원들은 지나가는 오토바이 기사들에게 음료와 과자를 무료로 건넨다. 노점마다 음식을 기다리는 줄이 길다랗다. 최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달 6일부터 다음달 5일까지 인도네시아는 라마단 기간이다. 무슬림의 5대 의무인 라마단은 2억6,000만 인구의 87%가 무슬림인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연례 의식이다. 매일 전투기가 발진해 굉음을 내서 라마단 ‘모닝 콜’ 역할을 할 정도(본보 13일자 18면)다.

라마단 기간인 24일 무슬림들이 금요일 연합예배를 드리기 전 사원 안에서 몸을 씻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라마단 기간인 24일 무슬림들이 금요일 연합예배를 드리기 전 사원 안에서 몸을 씻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라마단은 서기 624년(히즈리아 2년) 선지자 무함마드가 히라 동굴에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받은 알라의 첫 계시를 기념하는 달이다. 이슬람력 아홉 번째 달로 초승달이 보이는 시점에 따라 매년 바뀐다. 인도네시아 무슬림 양대 조직인 나들라툴울라마(NU)와 무함마디야는 각자 천문을 관측한다. 정부도 34개 주에 관측소 102곳을 운영하고 있다. 때로 의견이 달라 이슬람단체와 정부의 라마단이 하루씩 차이 나기도 한다. 올해는 종교부 장관과 공무원, 국회의원, 주요 이슬람단체장, 이웃 국가 대사, 천문학자, 수학자 등이 모여 정했다.

라마단 한 달 해가 떠 있는 동안은 푸아사(puasa)라 불리는 금식을 해야 하고, 흡연 성생활도 금지된다. 물 한 모금 허락되지 않는다. 나쁜 말, 분노나 상심 같은 감정의 배출도 자제한다. 유흥업소로 여겨지는 노래방 마사지숍 목욕탕 놀이동산 등은 통상 문을 닫는다. 낮 장사를 하지 않거나 내부를 천으로 가리고 영업하는 음식점도 있다. 단 임산부 노약자 환자 등은 금식에서 제외된다.

26일 라마단 기간이라 노란 천으로 내부를 볼 수 없게 가리고 영업하고 있는 자카르타 도심의 한 식당(왼쪽)과 커피전문점.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26일 라마단 기간이라 노란 천으로 내부를 볼 수 없게 가리고 영업하고 있는 자카르타 도심의 한 식당(왼쪽)과 커피전문점.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회사원 드판(34)씨는 “배고픔을 통해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알 수 있고, 각종 유혹과의 싸움에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 믿음이 강해진다”고 말했다. 운전기사 아뭉(51)씨는 “고통을 덜기 위해 코란을 많이 외우게 된다”고 했다. 욕망의 자제와 유일신을 향한 경건이 온 나라의 대낮을 밝히는 셈이다.

일몰 이후는 정반대다. 다음날 일출이 시작되기 전까지 금식과 절제는 사라지고 축제와 나눔이 넘친다. 가족 지인 이웃 직원을 초대해 마음껏 먹고 마시고 소통하며 즐기는 연회, 과부 고아 빈자에게 물질과 음식을 나누는 기부와 선행이 밤의 어두움을 몰아낸다. 정치인 기업인 등 유력 인사들은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기꺼이 제 집 대문을 열거나 호텔을 빌린다. 이 기간 연회는 오래전부터 약속이 잡히는 터라 급하게 다른 행사를 진행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라마단 기간에 지인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정식 만찬 '부카 푸아사'의 모습.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라마단 기간에 지인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는 정식 만찬 '부카 푸아사'의 모습.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금식을 깨는 식사를 인도네시아에선 흔히 부카 푸아사(buka puasa)라고 부른다. 본디 물과 대추야자 등으로 간단한 요기를 하는 이프타르(iftar)가 일몰 직후 첫 식사라면, 이어 하루 5번 기도에 더해 11번 절을 하는 타라위(tarawih) 저녁예배 뒤 진행되는 부카 푸아사는 정식 만찬이다. 둘을 분리하는 게 무함마드가 가르치고 직접 행한 방식이지만 최근엔 둘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한 달 내내 밤 연회가 열리다 보니 낮 시간 고통스러운 금식에도 불구하고 음식물 소비는 다른 달보다 30~50% 증가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라마단 직후 한 달치 월급을 보너스(THR)로 받는 상황도 소비를 부추긴다. 대형 몰과 백화점은 파격 할인 행사로 늦게까지 사람들을 유혹한다. “라마단 한 달 장사가 3~6개월치 매출과 맞먹는다”는 게 잇속에 밝은 중국인들 얘기다.

라마단 기간을 맞아 할인 판매를 하고 있는 자카르타 도심 대형몰의 서점.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라마단 기간을 맞아 할인 판매를 하고 있는 자카르타 도심 대형몰의 서점.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금식과 축제, 극과 극이 매일 주야로 엇갈리는 분위기는 이방인에겐 낯설고 헷갈린다. “무늬만 금식” “사실상 폭식”이라는 말도 들린다. 특히 고용주 입장에서 라마단은 작업 능률과 생산성이 가장 떨어지는데도 지출은 두 배(월급+보너스)로 늘어나는 달이다. 실제 오후 2시를 넘어가면 각 사무실마다 허기의 고통을 버티느라 무기력하게 반쯤 처져 있는 직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부 회사는 오후 4시에 종업원들을 퇴근시키기도 한다.

28일 자카르타에서 150㎞ 떨어진 반둥 시내에서 금식이 끝나는 일몰 이후 열리고 있는 라마단 밤 축제. 반둥=고찬유 특파원
28일 자카르타에서 150㎞ 떨어진 반둥 시내에서 금식이 끝나는 일몰 이후 열리고 있는 라마단 밤 축제. 반둥=고찬유 특파원

다른 그늘도 있다. 24년째 인도네시아에서 살고 있는 배동선 작가는 “라마단 전후로 뒷돈을 요구하거나 챙기려는 부정부패나 외국인 대상 단속이 늘어난다”고 말했다. 나쁜 마음을 품는 것조차 안 되는데, 도리어 2016년, 2017년 자카르타 도심 테러 같은 극단주의자들의 폭력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라마단 메뉴를 광고하고 있는 자카르타 도심 대형몰의 식당.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라마단 메뉴를 광고하고 있는 자카르타 도심 대형몰의 식당.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신이 위대한지, 종교의 형식을 맹신하는 인간이 대단하거나 어리석은지 가늠은 어렵다. 라마단의 참뜻을 삶에 적용하는 신도가 있는 반면, 남들 하니까 따라 하거나 지키지도 않는 ‘주민등록만 무슬림’도 있다. 다만 안선근(55) 국립이슬람대(UINㆍ우인) 교수는 “소통과 나눔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을 통한 경건이 담긴 라마단 문화를 아량으로 수용하는 자세와 그에 걸맞은 맞춤형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라마단 기간인 24일 막 사원에 도착한 무슬림들이 금요일 연합예배가 시작되자 주차장에 자리를 깔고 기도하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라마단 기간인 24일 막 사원에 도착한 무슬림들이 금요일 연합예배가 시작되자 주차장에 자리를 깔고 기도하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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