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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세계대회서의 성적 부진이 국내 바둑계 흥행 실패로 이어져
자신을 포함해 경쟁력 갖춘 선수로 거듭나야
천부배와 백령배 결승서 잇따른 패배는 뼈아픈 순간…인공지능(AI)으로 열공
신진서 9단이 22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열렸던 ‘제24기 GS칼텍스배 프로기전’ 3국에서 최종 우승을 확정한 다음 소감을 전하고 있다. 한국기원 제공

“기본적으로 우리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흐린 말끝에선 자책감이 묻어났다. 이제 막 우승컵을 들어올린 기쁨 보단 최근 침체된 국내 바둑계에 대한 걱정이 앞선 듯 했다. 약관(弱冠)을 눈앞에 둔 나이에 성숙된 자아성찰로 보였다. 22일 막을 내린 ‘제24기 GS칼텍스배 프로기전’(우승상금 7,000만원)에서 우승한 신진서(19) 9단은 본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 바둑계의 위기 원인을 이렇게 진단했다. 주요 세계대회에서 자신을 포함한 한국선수들의 계속된 부진이 결국 국내 바둑계 흥행 실패로까지 이어졌다는 평가로 읽혔다. 실제 주요 세계대회 가운데 현재 한국선수가 보유중인 타이틀은 지난해 ‘2018 몽백합배 세계바둑오픈대회’(약 3억원)에서 박정환(26) 9단이 따낸 게 유일하다. 이외의 ‘2019 백령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약 1억7,000만원)와 ‘2018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3억원), ‘2017 신아오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약 3억7,000만원·2년마다 개최)는 커제(22) 9단이, ‘2018년 천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약 3억3,000만원)는 천야오예(30) 9단이, ‘2018 LG배 조선일보 기왕전’(3억원)은 양딩신(21) 9단이, ‘2016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약 4억6,000만원·4년마다 개최)는 탕웨이싱(26) 9단 소유로, 모두 중국 선수들이 보유한 상태다.

이런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신진서 9단은 “선수층이 한국보다 두텁다고는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바둑에 밀려난 건 저를 포함해 우리 선수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당장, 상반기내 출범이 불투명해진 국내 최대 규모의 ‘KB바둑리그’(2018년 총 상금규모 34억원)와 각종 기전의 잇따른 폐지 등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풀이된다. 주요 세계대회 가운데 27일부터 본선 32강전이 벌어질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의 경우엔 주최측이 매년 중국 선수들에게 우승컵을 내준다는 이유에서 올해 대회의 축소 진행까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은 2017년부터 3회 연속 중국 선수에게 우승컵을 내줬다.

‘밀레니엄둥이’(2000년대 태생)인 신진서 9단은 명실공히 한국 바둑의 ‘차세대 권력’으로 일찌감치 낙점된 천재형 기사다. 그의 반상(盤上) 입문은 부산에서 바둑학원을 운영하던 부친(아마 7단)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일반적인 연구생 과정 대신 인터넷 바둑으로 독학한 그는 영재입단대회(2012년)를 통해 프로에 입단했다.

상승세는 계속됐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GS칼텍스배를 2연패한 신진서 9단은 지난달엔 ‘제20기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5,000만원) 최연소 우승과, 2018년 JTBC챌린지매치 4차대회(1,500만원) 우승, ‘2015 렛츠런파크배 오픈토너먼트’(8,000만원) 우수 등의 화려한 경력도 축적 중이다.

통산 369승1무140패(승률 72.5%)를 기록 중인 신진서 9단은 이 가운데 올해에만 30승9패(76.92%)로, 5월 기준 국내 랭킹 2위에 올라 있다. 신진서 9단은 지난해 말부터 국내 바둑계의 절대강자로 5년(2014년1월~2018년10월 국내 랭킹 1위) 가까이 군림해 온 박정환 9단과 랭킹 1위 자리를 순위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지난해엔 국내 바둑계에서 다승(82승25패)과 승률(76.64%), 연승(18승) 등의 부문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신진서(오른쪽) 9단이 올해 1월 중국 구이저우성에서 열린 ‘제4회 백령배 세계바둑선수권’ 결승전에서 커제 9단과 대국을 벌이고 있다. 신진서 9단은 3번기(3전2선승제)로 진행된 이 대회 결승전에서 2패로 커제 9단에게 우승컵을 내줬다. 한국기원 제공

‘폭주기관차’처럼 상승세를 이어온 신진서 9단이지만 풀어야 할 숙제도 남아 있다. “가장 큰 목표는 우선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는 거죠. 기회가 있었지만 살리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다시 올 것으로 믿습니다.” 인터뷰도 최근 잇따라 개최된 2개의 세계대회로 향했다.

신진서 9단에게도 가장 기억에 남는 대국과 어려웠던 순간은 지난해 12월 열렸던 ‘제1회 천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와 올해 1월에 벌어졌던 ‘제4회 백령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로 남아 있다고 했다. “천야오예 9단과 벌였던 천부배 3국의 경우엔 제 바둑인생에서 가장 간절했던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신진서 9단은 첫 세계대회 도전에 나섰던 당시 상황을 이렇게 복기했다.

신진서 9단의 아픈 기억은 꼬리를 물었다. “커제 9단과 맞대결한 백령배 결승도 잊을 수 없어요. 모든 대국 직후, 힘이 들지만 커제 9단과 결승전에서 패하고 나서는 뭘 어떻게 해야 될 지 모를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사실, 세계 랭킹 1위와 결승전에서 우승컵을 놓고 벌이는 기회가 쉽게 찾아오는 건 아니잖아요.” 천부배와 백령배 모두 유리했던 형국에서 잇따라 나온 실수로 우승컵을 헌납했기에 안타까움은 더했다.

인터뷰 말미에선 최근 ‘열공’ 중인 인공지능(AI)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도 밝혔다. “AI가 나오기 전에는 초일류급인 커제 9단이나 박정환 9단이 두는 수가 대부분 절대점으로 생각됐어요. 근데 AI가 나오고 나서는 이게 완전히 깨졌죠. 그 만큼, 공부하고 수련을 해야 될 부분이 많아졌다는 점에선 AI가 고마웠습니다.” 긍정적인 부문을 소개한 신진서 9단은 부정적인 영향도 귀띔했다. “지금은 아무리 잘 둬봐야 인간이 AI를 이길 수 없다는 게 입증됐잖아요. 프로바둑 기사로서 최고 경지에 올라선다 하더라도 어차피 AI보다 한 수 아래가 되는 겁니다.” 인간계 최고 두뇌 스포츠로서 각인됐던 프로바둑 기사로서의 자부심이 희석됐다는 데 대한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떡잎부터 달랐던 기사였기에 그랬을까. 신진서 9단은 화려한 타이틀에 대한 욕심 보단 진정한 바둑인으로 남고 싶다는 희망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세계대회 우승을 많이 하면 좋겠죠. 하지만 그 보단 진짜 바둑을 좋아했던 기사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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