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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객들이 카파도키아 일출 열기구를 기다리며 사진을 찍고 있다. 포토아이

어느 무리에든 돌출되는 사람은 나오게 마련이다.

엊그제 터키 여행에서 돌아왔다. 스물여섯 명으로 구성된 패키지였다. 지난달에 오픈해 깨끗하고 한산한 이스탄불 신공항에 내릴 때부터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심상치 않은 존재감. 입국심사를 마치고 전세버스를 타러 이동할 때까지 그 목소리는 멀어지지 않고 따라붙었다. 그이를 포함한 친ㆍ인척 여섯 명이 우리 패키지의 멤버였던 거다.

다행히 버스 맨 뒷자리에 앉은 우리 가족과 달리 그이네 일행은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나이든 몇몇 사람이 그에게 눈총을 주든 말든, 여행이 마무리될 때까지 지금의 자리 배치가 유지되면 참 좋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하지만 무심함을 가장하던 나의 졸렬함이 드러나는 순간은 머잖아 찾아왔다. 다음날 점심식사를 할 때였다. 저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이가 서빙하는 터키 청년을 손짓으로 부르더니 홀이 다 울릴 만큼 큰 소리로 김치와 고추장을 달라고 했다. “한국 사람을 단체로 받았으면 김치, 고추장을 내는 게 도리지. 두유 노우 김치?” 뭐가 그리 재밌는지 그이 일행은 테이블을 두드리며 웃어대고, 사기충천해진 그이는 깻잎장아찌와 깍두기까지 줄줄이 나열했다. 그 테이블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품위와 예절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이웃나라 여느 관광객들과 차원이 다른 ‘코리안 애티튜드’를 각인시키리라 다짐했을 다른 이들의 얼굴에는 곤혹을 넘어 모종의 절망감이 감돌았다. 그건 애국심이 투철한 나도 마찬가지여서 솟구치는 짜증을 안면 근육에 가득 실어 그쪽을 째려보았다. 그러다 마주 앉은 올케와 시선이 마주쳤다. “형님, 이걸 어째요? 여행 내내 저 꼴을 견뎌야 할 듯해요.” 일찌감치 ‘글로벌 스탠더드 매너’를 온몸으로 체득한 올케는 울 듯한 표정이었다.

사흘째 저녁. 호텔 로비를 분주하게 누비던 그이가 개선장군처럼 우리 패키지 일행에게 다가왔다. “우하하! 방금 들어온 기쁜 뉴스요. 오늘 새벽에 우리가 탄 그 기똥찬 풍선 있잖소? 내일은 바람이 불어서 그 풍선이 아예 못 뜬답디다. 캬! 돈 쫌 더 들여서 터키 비행기로 갈아타고 하루 일찍 여기로 오길 천만다행이지. 저기 저 사람들, 엊그제 인천공항에서 우리랑 같은 비행기로 출발했잖소. 아하, 그란데 어짜나? 몇 푼 아끼겄다고 이스탄불에서 여기까정 하루 반 걸려 버스 타고 오는 바람에 터키 여행의 별미라는 풍선을 못 타불게 생겼네.” 여기저기서 눈 흘김이 쏟아졌지만 카파도키아 열기구만큼이나 단단하게 부풀어오른 그이의 행복감에 흠집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점심때였다. 하필 옆 테이블에 앉은 그이가 ‘김치 고추장’을 입에 올리는 순간, 나는 비행기에서 꼬불쳐둔 고추장 튜브 두 개를 그에게 건넸다. ‘부탁이니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주세요.’란 말은 차마 못 했다. 세상에나! 그이의 표정이 일순 아이처럼 환해졌다. 그 모습을 보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고추장을 드시고 원기를 보충한 걸까? 빡빡한 일정에도 굴하지 않고 그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맡은 바 소임에 충실했다. 돌아오는 이스탄불 공항에서 그가 우리 패키지 일행을 찾아다니며 알렸다. “잘 들어요. 지금 여기 있는 **투어, **관광, **파크투어, *좋은여행 팀들, 전부 다 그 기똥찬 풍선을 못 탔대요. 고로 우리만 터키 여행을 지대로 해분 셈이지.” 그 말을 들은 교양 있는 이들의 표정에 미처 숨기지 못한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인천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고 돌아서는데 어느새 익숙해진 그 목소리가 나를 다시 한번 불러세웠다. “이보시오, 젊은 양반. 고추장, 정말 고마웠소. 내 잊지 않겄소.” “아, 네. 덕분에 저희도 즐거웠어요. 건강하세요.” 꽃 같은 웃음을 날리며 우리는 각자의 길로 떠났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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