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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스테이션 일레븐’
※ 과학소설(SF)을 문학으로, 과학으로, 때로 사회로 읽고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에 격주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치명적인 독감이 문명을 파괴하고 나서 20년이 지났다. 소수의 생존자가 군데군데 작은 마을을 이루며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셰익스피어 연극을 공연하는 유랑 악단이 있다. 악단의 여주인공 커스틴의 팔에 새겨진 문장이 바로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스타 트렉’에 나오는 말이다!)

인류는 이렇게 몰락했다. 일거수일투족이 파파라치의 표적이 되는 할리우드 스타 아서 리앤더가 출연한 연극 ‘리어왕’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처음 선보인 날, 독감 환자 한 명이 탄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했다. 리어왕을 연기하던 리앤더는 무대에서 급성 심장 마비로 쓰러지고, 독감은 빠른 속도로 희생양을 찾으며 세계 곳곳으로 퍼졌다.

스타 배우가 심장마비로 무대에서 쓰러질 때, 현장에 있었던 대사 없는 아역 배우가 바로 커스틴이었다. 문명이 몰락하고 나서, 그녀는 어렸을 때의 희미한 기억만 안고서 관객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셰익스피어 연극을 공연한다. 그런 그녀의 배낭 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만화책 ‘닥터 일레븐’이 들어있다.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 Sarah Shatz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의 ‘스테이션 일레븐’은 독특한 종말 소설이다. 독감이나 핵전쟁으로 문명이 몰락한 후의 스산한 삶을 다룬 SF 소설은 한두 권이 아니다. 스티븐 킹의 ‘스탠드’(독감)나 로버트 맥캐먼의 ‘스완송’(핵전쟁)은 꼭 한 번 읽어 봐야 할 걸작이다. 하지만 ‘스테이션 일레븐’은 이런 걸작 못지않은 매력으로 시선을 잡아챈다.

독감과 그 이후의 혼란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소수의 생존자도 폭력과 갈등 속에서 하루하루 지탱하는 일이 버겁다. 그런 비참한 삶의 현장을 누비면서 노래하고, 연주하고, 연기하는 유랑 악단. 그리고 그런 악단의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 삶, 또 그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예술의 가치를 이보다 더 절박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장면은 어떤가. 몰락 직전 마지막 비행을 하고서 어떤 공항에 남겨진 사람들. 살아남은 소수는 아예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세계 곳곳에서 날아와 공항에 남겨진 이들은 서로에게 자기 언어를 가르쳐 주고, 죽은 사람으로부터 나온 과거의 물건을 하나 둘씩 모으며 ‘문명 박물관’을 만든다. 비행기가 날지 않는 폐허가 된 공항이 언어와 문명의 박물관이 되는 기적!

이뿐만이 아니다. 책을 한 쪽, 한 쪽 넘기면 몰락 직전 ‘연극처럼’ 삶을 마감한 스타 배우와 수수께끼의 만화책(‘닥터 일레븐’)을 중심으로 연결된 등장인물의 사연이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씩 정체가 드러난다. 그들의 얽히고설킨 이야기에 정신 없이 몰입하다 새삼 깨닫는다. ‘세상이 망해도, 알 수 없는 인생의 미스터리는 계속되는구나!’

스테이션 일레븐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ㆍ한정아 옮김
북로드 발행ㆍ 456쪽ㆍ1만 3,800원

‘스테이션 일레븐’은 맨델이 쓴 네 번째 소설이다. 2015년 책이 나오자마자 거의 모든 매체에서 기사가 나오고, 얀 마텔(‘파이 이야기’), 도나 타트(‘황금방울새’) 등의 인기 작가가 찬사를 보내면서 화제가 되었다. 올해 만 40세의 맨델은 극단에서 춤을 추다 글쓰기로 전업했다. 이 독특한 소설은 춤과 글이 결합한 그녀의 삶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마지막으로 고백 하나. 망설였다. 이 책을 소개할까, 말까. 혼자만 알고 읽고 싶은 책이 있다. 내게는 이 책이 그랬다. 그래서 정말 좋아하는 사람, 이 책의 진가를 알아줄 것 같은 사람에게만 권하곤 했었다. 이제 여러분에게 이 멋진 책을 선물처럼 권한다. 참! 이 책은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 조지 R.R. 마틴도 이렇게 극찬했었다.

“굉장히 구슬프고, 매우 아름답고, 내가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고, 끊임없이 되돌아갈 소설이다.”

SF 초심자 권유 지수 : ★★★★★ (별 다섯 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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