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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ㆍ군벌 배 불리는 저개발국 식량원조

입력
2019.05.22 16:28
수정
2019.05.22 18:1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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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시민들이 정부의 긴급 식량 원조 프로그램인 ‘CLAP’에서 제공하는 콩과 쌀, 참치, 분유 등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카라카스=AP 연합뉴스
지난해 5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시민들이 정부의 긴급 식량 원조 프로그램인 ‘CLAP’에서 제공하는 콩과 쌀, 참치, 분유 등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카라카스=AP 연합뉴스

경제난과 자연재해로 굶주리는 저개발국에 인도주의 목적으로 제공되는 식량 원조가 그 나라의 비양심적 독재자ㆍ군벌ㆍ부패관료 등의 배만 불리는 쪽으로 악용되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운영하는 식량 원조 프로그램이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의 ‘돈세탁’ 창구로 악용되는 정황이 포착됐고, 4년째 내전 중인 예멘에서도 후티 반군이 유엔 구호물자를 빼돌리고 있다. 사이클론이 덮친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는 부패한 지방 관료가 구호 식량을 나눠 주는 대가로 여성들에게 성상납을 강요하는 참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스저널(WSJ)은 21일(현지시간) 미국 정부가 최근 베네수엘라 정부군이 운영하는 ‘비상식량 프로그램(CLAP)’이 마두로 정권의 자금 세탁 목적으로 악용되는 것으로 보이는 정황을 발견해 대응 방침을 마련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베네수엘라 군 관계자와 정치인 등 관련자를 제재하는 한편 사기 혐의로 기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로이터통신도 두 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3개월 내로 이런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WSJ에 따르면 CLAP는 입찰 과정 없이 부풀린 가격으로 해외 식품 공급업체와 계약을 해 빼돌린 차익을 부동산, 해외 계좌에 은닉했다. 살인적 물가 상승률 등으로 경제 파탄 위기에 놓인 베네수엘라에서는 최소 15% 국민이 주요 식량원으로 CLAP에 의존하고 있다. WSJ는 미 정부의 규제는 “마두로 정권의 돈줄을 끊는 동시에, 정권의 정당성을 깎아 내리는 목적이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마두로 측은 이는 ‘미국의 중상모략’이며 ‘자국의 식량 수입 능력을 방해하기 위한 시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예멘의 수도 사나에 후티 반군 지지자들이 모여든 가운데, 한 대원이 차량 위에 설치된 기관총을 들고 있다. 사나=EPA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예멘의 수도 사나에 후티 반군 지지자들이 모여든 가운데, 한 대원이 차량 위에 설치된 기관총을 들고 있다. 사나=EPA 연합뉴스

아라비아반도 남단 예멘에서는 내전 탓에 굶주림에 시달리는 민간인들에게 전해졌어야 할 유엔 구호물자를 후티 반군이 가로채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CNN에 따르면 세계식량계획(WFP)은 구호물품을 받았다고 서명한 예멘 시민들의 60%가 실제로는 받지 못했다며 “속임수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비즐리 WFP 집행국장은 전용되는 구호물품 규모가 전체 지원 규모인 월 1억5,000만달러(약 1,789억원)의 5~10%는 될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배고픈 사람들의 입에서 음식을 훔치는 행위”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지난 3월 사이클론 ‘이다이’로 1,000명 이상이 숨진 아프리카 동남부 모잠비크에서는 부패한 지방 관료들이 구호물자 분배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대가로 피해 주민들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제 인권감시단체 휴먼라이트워치(HRW)는 이 사실을 고발하면서 돈이 없는 빈민 여성들을 대상으로는 쌀 한 봉지 대신 성상납을 강요하는 일도 벌어진다고 전했다. HRW 남아프리카국장인 데와 마빈가는 “사이클론 이후 가족을 먹여 살리려 애쓰는 여성들에 대한 성적 착취는 역겹다”면서 “당국은 즉각 조사와 처벌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지난 3월 사이클론 ‘이다이’가 모잠비크를 강타한 이후 홍수가 발생한 베이라 지역의 시민들이 개인 물품을 옮기고 있다. 베이라=EPA 연합뉴스
지난 3월 사이클론 ‘이다이’가 모잠비크를 강타한 이후 홍수가 발생한 베이라 지역의 시민들이 개인 물품을 옮기고 있다. 베이라=EPA 연합뉴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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